2022년 6월 24일 금요일

조선 후기 예송 논쟁에 숨어있는 매우 민감한 정치적 배경.txt

 학교에서 한국사 교과서에서 예송논쟁은 한번은 언급되기 때문에 대충은 들어봤을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대충 배운 내용은 '효종이 죽자 계모인 자의대비가 상복을 얼마나 입어야하는가(1차 예송),

15년 후 효종의 부인인 인선왕후가 죽자 시어머니인 자의대비가 상복을 얼마나 입어야하는가(2차 예송) 로 

온 나라의 사대부들이 논쟁을 했다' 정도라서 이 문제가 왜 당시에 그렇게 불타옸랐는지에 대해선 잘 모르죠.

그런데 자칫 이 쓸데없는 상복 논쟁 속에는 사실 16~17세기 조선왕조사가 다 관통되어있다고 봐야합니다. 



왕조 국가이든, 현대 민주주의 국가든 가장 중요한 건 권력을 쥐는 사람들의 정통성에 대한 것입니다.

현대 민주주의 국가는 선거를 통해 국민에게 가장 많은 선택을 받은 사람이 권력을 잡게 되어있고, 그래서 공정한 선거가 굉장히 중요하죠. 

그래서 부정선거를 통해 집권하거나, 선거 없이 무력으로 권력을 찬탈하는 쿠데타를 가장 경계하죠.

왕조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건 왕위계승권이라고 할 수 있고, 이 왕위계승권은 법으로 정해져있죠.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조선왕조는 유교 예법이 곧 국법이고, 왕위계승 역시 유교 예법에 따릅니다.

조선은 왕위계승에 대해선 확실히 정해놓지는 않았지만, 이 당시 제사를 상속할 때 유교 예법에서 순위를 보면

1순위 적장자 및 적장손

2순위 중자 및 적장손

3순위 적장자의 첩들의 자손

4순위 형제 로 되어있습니다. 

유교 사회에서 제사를 상속한다는 건 종가를 계승한다는 문제와 연결되어있죠.

현대 사회에서도 상속 문제로 콩가루 집안 되는 사례가 수두룩하다는 걸 생각하면 이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지 감이 오실 겁니다.

쉽게 말해 조선왕조는 '적장자 계승'을 우선으로 했습니다. (정작 실제 적장자가 잇는 경우는 별로 없었지만)

문제는 이런 적장자 계승 원칙이 선조 이후 효종까지 왕들이 다 논란을 겪을 정도로 흔들렸다는 점입니다. 



1. 선조의 정통성 문제

명종 사후 왕위를 이은 선조는 적장자는 커녕 방계 왕족이었습니다. 

정확히는 명종의 아버지 중종의 서자7남 덕흥군의 3번째 아들이었습니다.

물론 계승 당시에는 중종의 서자1남 복성군의 (중종의 적자 2명이 인종, 명종) 양자로 있었기에 명종 사후 계승서열 1위였고

후에 다시 명종의 양자로 족보를 갈아버려서 정통성 문제를 차단하려 했습니다. 

조선시대에서는 혈연보다 종가를 누구에게 이어주느냐가 중요해서 양자로 들어가는 걸로 이런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이 가능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조는 정통성 문제로 고생을 했습니다.


2. 광해군의 정통성 문제

근데 이 선조가 임진왜란 때 세자로 삼은 광해군 역시 적장자가 아니였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광해군은 후궁 공빈 김씨의 두번째 아들로, 서자1남인 임해군보다도 계승서열이 낮았으나

임해군이 워낙에 성품이 개차반이라 제외되었고, 임진왜란이란 국가적 위기 속에 광해군이 세자가 되었습니다.

하여튼 광해군 본인도 그렇게 탄탄한 입지가 아니었고,  후에 선조가 나이를 먹고 적자인 영창대군을 낳아버리면서

이것이 후에 광해군 시기 온갖 논란의 원인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흔들리는 자신의 정통성에 대한 집착으로 인한 무리수가(온갖 역모 사건, 영창대군 사사, 인목대비 폐비 등) 광해군의 몰락의 중요한 원인이 되죠.


3. 인조의 정통성 문제

그리고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즉위한 인조는 이 문제에서 오히려 한술 더 떠서 족보를 더 꼬아놨습니다.

일단 인조의 아버지가 선조의 서자5남 정원군인데, 선조의 서자 3,4남이 일찍 죽어서 서자2남이었던 광해군 다음 순위였고

위에 언급했듯이 선조의 양자로 들어가는 걸로 어느 정도 해결이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이 와중에 자기 아버지 정원군을 왕으로 추숭하면서 정통성을 또 무너뜨리죠.

이 문제는 당시 인조반정의 주역들까지 거의 대부분 반대할 정도로 인조의 무리수였는데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이 광해군 다음 순서의 왕실 어른이었지만, 문제는 한번도 세자였던 적이 없었습니다. 

이 세자란 명칭이 중요한게, 세자는 사실상 다음 왕이기 때문에, 다른 왕의 아들들(즉 세자의 형제들)과 군신관계 정도로 차이가 납니다. 

그래서 세자였던 적도 없는 사람을 억지로 왕으로 추승하려니 다들 반대한건데, 인조는 이걸 무리하게 밀어붙입니다.

선조의 양자로 왕위를 이었지만, 진짜 아버지 정원군도 왕으로 만들어버리는 개족보를 만든 셈이죠.


4. 효종의 정통성 문제

인조에게는 장남 소현세자와 차남 봉림대군이 있었으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모두 병자호란의 패배로 인해

청으로 끌려가서 9년동안이나 인질로 잡히게 되고, 청은 이 둘을 구실로 조선와 인조를 두고두고 협박하는데 써먹습니다.

붙잡혀간 소현세자는 청에서 농장을 만들어 포로로 잡힌 조선인들을 구해 일하게 한 후 장사를 하고, 그 돈으로 다시 청의 인맥을 쌓는 행보를 보여줍니다.

문제는 인조 입장에선 청나라에서 독자 행보를 보이며 자기 입지를 쌓는 세자가 여러모로 불편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게 단순히 부자 관계가 아니라 왕조 국가에서 왕과 차기 왕의 권력 구도에서 생각하면

청나라의 입김을 등에 업은 세자가 조선 왕으로 즉위할 수 있는 그림이 되거든요.

거기에 고려의 원 간섭기에 고려 왕들이 원나라 입김에 따라 즉위했다 마음대로 갈아치워졌던 전례가 엄연히 있었기에 

청나라의 입김이 커진 임금이 즉위하는 건  조선의 입장에서 경계할 일이었습니다. 

결국 인조와 소현세자의 관계는 멀어질 수 밖에 없었고, 인조는 노골적으로 세자를 견제합니다. 

그리고 9년만에 조선 귀국길에 나선 소현세자가 귀국길부터 앓았던 병 때문에 귀국 3개월도 안되어 급사하게 되자

인조는 소현세자에게 세명의 자식이 있었음에도 소현세자의 동생 봉림대군(후에 효종)을 세자로 책봉합니다.

하지만 이 과정은 '적장자 다음 순서는 손자'로 순서를 정한 예법을 어긴 것이기 때문에 두고두고 문제가 될 수 밖에 없었고

실제로 당시에도 '예법에 따라 소현세자의 아들이 왕위를 이어야한다.'는 분위기가 있었던 걸로 보입니다. 

결국 효종의 세자 정통성은 흔들릴 수 밖에 없었고, 인조는 이걸 해결하기 위해 

소현세자빈 강씨를 거의 역적 혐의를 뒤집어 씌워 죽여버리면서 '역적의 자식에게 적통이 돌아갈 수 없다'란 명분을 만들고

강씨 집안을 풍박박산 내버린 후 소현세자의 남은 세 아들조차 귀양보내버립니다. 


5. 현종의 정통성 문제

현종은 효종의 적장자로 왕위를 이었기 때문에 본인의 정통성은 문제가 없습니다만 위에 언급한 아버지인 효종의 정통성이 문제였습니다. 

거기에 귀양갔던 소현세자의 아들 경안군이 살아있었기에 이것 또한 두고두고 논란거리였죠.

이런 상황에서 효종이 죽고 상복을 입어야할 대상은 인조의 부인이자 효종의 어머니인 자의대비였는데(물론 인조가 늦게 결혼해서 자의대비가 효종보다 더 어렸지만)

적장자가 아니지만 왕위를 이은 효종의 위치가 골치 아파진 셈이죠.

문제는 여기서 서인 송시열이 '아들이긴 하지만 적장자가 아니므로 1년을 입자'라는 폭탄을 터뜨립니다.

이건 효종의 정통성 문제+아직까지 살아있던 소현세자의 아들 경안군의 존재와 직결되기 때문에 자칫

'효종은 적장자가 아님=왕위계승이 적절하지 않음=소현세자의 아들이 적통=그러면 현종 너는 뭐지?' 란 말그대로 왕가를 뒤흔드는 폭탄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서인이 송시열의 주장을 잘 돌려서 주장해서(조선 예법에는 적장자 구별없이 아들은 1년이라고 되어있으니 1년으로 하자고 주장) 1차 예송에선 승리하지만

2차 예송에서 송시열이 또 '맏며느리는 1년이지만 효종의 부인은 맏며느리가 아니므로 9개월'이라 주장하는 바람에 또 이 문제가 꼬이고

서인은 이 주장을 수습하기 위해 '중국 법에 9개월이라 되어있으니 9개월로 하자'라고 정리합니다. 

그러나 현종이 서인의 주장의 모순을 공격하며(예전에는 적장자 구별 없던 조선 예법을 따르더니 왜 지금은 중국 예법을 가져오냐? 1차 때랑 똑같이 1년으로 하자.)

서인의 주역들을 날려버리면서 서인의 권력이 줄어듭니다. 



결론.

표면적으로는 단순히 상복을 입는 기간으로 싸운 것으로 보이는 예송논쟁은 

조선 왕조 입장에서는 선조 때부터 끊임없이 이어진 왕의 정통성 논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왕조의 정통성과 계승권 시비 논쟁은 폭탄과도 같은 주제죠.

여기에 예송논쟁에 참여한 서인과 남인의 성리학적 배경까지 설명하면 너무 복잡한거 같아서 그건 나중에 따로 쓰겠습니다. 

확실한건 역사에서 현대인의 관점에선 왜 저런 걸로 싸웠냐 하는 것들도

당시의 관점에서는 매우 중요한 논란이었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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