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6월 24일 금요일

일본 근대사 이 동네만 알아도 대충 파악 가능하다 2편 - 아이즈 번

 1868년 3월, 메이지 신정부와 전쟁을 했던 막부의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에도(도쿄)에서의 결전을 포기하고 항복을 합니다.

그런데 전황이 불리했지만 여전히 막부파도 건재한 상황이었고, 특히 도쿠가와 막부의 근거지인 에도와 일본 동북부 지역은 여전히 막부를 지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래나 저래나 일본은 무사의 나라였기 때문에, 싸우기도 전에 항복을 한 쇼군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겼고

항복에 반대한 막부파들은 계속 에도 근방에 집결하여 전투를 이어나가고 있었습니다.

특히 이미 근대화된 전력을 갖춘 막부 해군은 신정부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안전 보장을 요구하며 계속 에도만에서 위협을 가하고 있었는데

신정부의 해군 전력으로는 이들을 이길 수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이 해군은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안전을 보장받자 8월에 에도를 떠나 북쪽 홋카이도로 갑니다.


신정부 역시 얼른 내전을 끝내고 자신들의 힘이 막부파보다 세다는걸 과시해야 했기 때문에

에도 외곽지역에서 저항을 계속하는 막부파들을 공격했고 승리합니다. 

1868년 5월이 지나자 막부파들은 일본 동북부 지역으로 후퇴하기 시작했고, 신정부 역시 추격을 개시합니다.

이미 쇼군도 항복했고, 흉작으로 경제적 문제를 겪은 동북부 지역의 번들은 전쟁을 끝내기 위해 타협을 제시하는데

막부의 편에 섰다가 역적이 된 쇼나이 번(현재 야마가타 현 북부)과 아이즈 번(현재 후쿠시마 현 서부)에 대한 관대한 처분을 요청합니다. 

하지만 신정부와의 협상이 결렬되면서 동북부 지역 번들은 동맹을 맺고(오우에츠열번동맹) 신정부와 전쟁을 하게 됩니다.


이 막부파 번의 중심 세력 중 하나인 아이즈 번은 철저한 막부파였는데, 영주인 마츠다이라 가문 부터가 도쿠가와 가문과 관련이 있습니다.

원래 도쿠가와 가문은 마츠다이라 성씨를 쓰고 있다가 개명을 했던 것이고, 막부를 성립한 후에도 가주와 후계자만 도쿠가와 성씨를 썼습니다. 

그외의 차남들이나 방계 가문, 또는 강력해서 명예를 세워줄 필요가 있었던 가문들이 마츠다이라 성씨를 쓸 수 있었습니다. 

아이즈 번의 마츠다이라 가문도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자손들(정확히는 사생아)입니다. 


9대 영주인 마츠다이라 카타모리는 막부 말기인 1862년 교토를 수호하는 교토 수호직에 임명되어 5년간 교토의 치안을 책임지며 막부파로 활동했고

교토에서 정치적 테러를 일삼던 양이 지사들을 상대하기 위한 무력 집단으로 신선조(신센구미)를 만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전에 조슈 번이 교토의 궁을 쳐서 정권을 장악하려 했을 때 앞장서서 진압하기도 합니다. 

보신전쟁이 시작되자 교토에서의 첫 전투에 참여했으나 패배하여 아이즈 번으로 후퇴하죠.

신정부의 주축인 조슈 번 인사들은 이전에 교토에서 막부파로 활동하며 자신들을 공격했던 아이즈 번에 이를 갈고 있었었습니다.


신정부의 병력들이 동북부까지 밀려오자 결국 후퇴하는 막부파, 동북지역의 번들과 연합하여 신정부와 맞서기로 하지만

애초에 전투보다 아이즈 번을 구명하기 위해 뭉쳤던 동북지역의 번들은 신정부의 공격에 하나둘씩 박살나기 시작하자 와해되기 시작합니다. 

또한 아이즈 번은 5년간 교토 수호직으로 활동하면서 막대한 돈을 써야했기 때문에 번의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아 군의 상태도 좋지 않았고

따라서 계속 패배하다가  아이즈 번의 중심지인 와카마츠 성까지 밀리게 되고, 일부 여성들이 직접 무장을 하고 싸웠을 정도로 저항했으나 전황은 뒤집어지지 않습니다.

결국 1달간의 포위전 끝에 1868년 11월에 아이즈 번은 항복하게 됩니다.


신정부는 이 아이즈 번의 '반란군'들을 매우 가혹하게 처분합니다. 

아이즈 번에서는 약 3천명이 전쟁 중에 사망하고, 관군은 아이즈 번 지역에서 약탈, 강간을 일삼았다고 합니다.

또한 와카마츠 성이 함락될 때 아이즈 번의 가신들과 무사 가족들 수백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아이즈 번의 무사들 등 1만 7천여명이 일본 혼슈 섬 북부 끝의 황무지로 강제로 쫓겨나게 됩니다. 

개발도 제대로 되지 않은 척박한 땅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겨우 연명하거나 굶어죽다가 겨우 귀환합니다. 

그리고 아이즈 번에 남은 사람들도 모두 평민으로 신분이 강등됩니다. 


이후로도 정부에 맞섰던 동북 지역들은 차별을 받는데, 동북 지역을 관리하는 고위직들을 메이지 유신의 주축이었던 사쓰마, 조슈 츨신들이 맡았고,

관료나 군에서도 사쓰마, 조슈가 독점하던 분위기에서 동북 지역 출신들은 차별을 받아 출세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분위기는 현대에도 이어져 120년이 지난 1986년 구 조슈 번 지역인 야마구치현 하기 시에서 아이즈와카마츠 시에 화해와 우호 관계를 제안했지만 

아이즈와카마츠 시에서는 아직은 화해할 시기가 아니라는 이유로 시민들이 반대하며 거절합니다. 

또한 2018년 일본에서 '메이지유신 150주년'을 크게 기념할 때

구 아이즈 번 지역은 '보신전쟁 150주년'을 강조하면서 아직도 메이지유신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메이지 유신은 사쓰마, 조슈, 토사, 사가 번, 특히 사쓰마와 조슈 번이 중심이 되어 막부를 무너뜨리고 신정부를 만들었고

이후에도 사쓰마와 조슈 출신들이 메이지 신정부의 요직들을 차지하면서 사실상 이 두 번의 파벌들을 중심으로 정치가 이뤄집니다. 

그런데, 이후 1873년 그 유명한 '정한론(한국을 정벌하자는 주장)' 논쟁으로 사쓰마 파벌의 주축 중 하나이자 보신전쟁의 지휘관이었던 사이고 다카모리가 권력에서 밀려나

고향으로 낙향하여 1877년 반란을 일으키지만 (세이난전쟁) 패배합니다.

이 때 징병제를 실시한지 얼마 안되어 군대가 부족했던 일본 정부에서 약 9500명의 무사 출신들을 전쟁에 동원하는데

이 중 절반이 옛 동북 지방 출신들이었고 이들은 10년전 자신의 고향을 짓밟았던 사쓰마에게 이를 갈고 있었기에 전장터에서 앞장서며 피의 복수를 합니다. 



다음에는 사쓰마 번이 왜 메이지 유신이 주축이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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