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6월 24일 금요일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에 얽힌 여러 이야기들

 역사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추사 김정희에 대해서 한번쯤 들어봤을겁니다.

보통 김정희는 그가 만든 글씨체인 추사체로 많이 언급되는데

실제로 김정희는 당시 문인 예술가들이 갖춰야할 시, 서, 화에 모두 능한 사람이었고

자부심도 굉장히 강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남아있는 그림 작품 중에 '세한도'는 국보로 지정될 정도의 그림입니다.


그런데 세한도를 살펴보면 도저히 잘 그린 그림이라 할 수 없습니다.

원근법도 안맞고, 그림 초점도 잘 안맞는 느낌이죠.

그리고 집 한채와 나무 정도만 그려져있는  매우 간결한 그림입니다.

그렇지만 이 그림은 지금 국보로 지정되어있을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일단 위에 적었듯이 김정희는 절대 그림을 못그리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당대의 화가들에게 그림을 가르쳐줄 정도였고, 특히 흥선대원군의 유명한 난초 그림을 직접 가르쳐준 사람이죠.

즉, 김정희는 그림을 못그려서 저렇게 그린 것이 아니라, 무슨 이유가 있어서 저렇게 그린 것이죠.


김정희는 명문가의 후손이었고, 벼슬도 상당히 높은 자리까지 오르지만

세도가인 안동김씨를 건드려서 화를 입은 관리 윤상도와 관련이 있다는 이유로 엮여서

제주도로 8년간 유배를 떠나게 됩니다.

명문가로 평생을 지낸 금수저 김정희의 입장에서 제주도 유배는 굉장히 힘겨운 일이었는데

한번은 제자였던 이상적이 청나라에서 구해온 서책 약 100여권을 가지고 제주도의 김정희를 찾아옵니다.

죄인과 엮이는 것이 좋을 것이 없음에도 청나라까지 가서 서책을 구해온 제자가 김정희는 고마웠습니다.


김정희는 이런 본인의 처지를 그림으로 녹였는데, '세한'은 논어에서 가져왔습니다.

'한겨울 추운 날씨가 되어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즉, 시련을 겪을 때 비로소 그 사람의 진면목이 보인다는 뜻이죠.

또한 세한도의 발문을 보면 김정희가 잘나갈때나 유배생활을 할 때나

태도가 바뀌지 않고 자신을 대해주는 이상적에 대한 고마움이 묻어나옵니다. 

이런 의미를 그림으로 녹여냈기 때문에, 세한도는 높은 가치를 가지게 되었고

이상적이 다시 청나라로 넘어가 청나라 문인들에게 세한도를 보여주자

그것을 본 청나라 문인들이 감탄하여 감상평을 적었습니다.

즉, 세한도의 가치는 당대에 보편적으로 인정받았던 것이죠.


그런데 이 세한도는 제자인 이상적이 죽은 후에 이런저런 과정을 거치다가 

북경으로 건너가게 되고, 경성제국대학의 교수였던 후지츠카 지카시가 구입합니다.

후지츠카는 '조선에서 청나라 문화의 유입과 김정희'란 주제로 동경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을 정도로

김정희 애호가였으며, 그가 조선에서 모은 김정희의 예술품만 수천개가 넘었다고 합니다.

후지츠카는 이 세한도를 매우 아꼈는데, 이 세한도를 돌려받기 위해 조선에서 한 사람이 일본으로 건너갑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그 '서예'라는 단어를 최초로 만든 서예가 손재형이었습니다.


손재형은 1944년에 도쿄로 건너가서 짐을 풀고 매일 아침 저녁으로 후지츠카를 찾아가 세한도를 달라고 요청합니다.

1944년이면 태평양전쟁 막바지로, 이미 도쿄에 폭격이 개시될 때였는데

손재형은 폭격을 아랑곳하지 않고 후지츠카의 집을 매일 두 차례 방문합니다.

손재형의 끈질김에 후지츠카는 결국 아들에게

"내가 죽거든 손재형에게 아무 대가를 받지 말고 세한도를 돌려주어라."라고 합니다.

하지만 폭격은 점점 심해지고, 손재형은 아랑곳않고 계속 후지츠카를 찾아옵니다. 

결국 후지츠카는 전쟁통에 위험을 무릅쓰고 온 손재형에게 세한도를 돌려주게 됩니다.

그리고 손재형이 세한도를 돌려받고 조선으로 돌아간 후, 도쿄에는 미군의 대공습이 벌어지고

후지츠카의 서재가 폭격에 불타버리면서 후지츠카가 소장한 김정희의 작품 상당수가 소실되었고

손재형의 노력이 없었다면, 어쩌면 우리는 세한도를 영영 보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손재형은 귀국 후에 위창 오세창을 찾아가 세한도를 보여줍니다.

위창 오세창은 독립운동가이자 예술에 조예가 깊은 걸로 유명한 인물이었는데

오세창이 예술적 안목을 가르친 인물이 그 유명한 간송 전형필입니다.

근데 오세창의 아버지는 역관 오경석이었고, 이 오경석은 추사 김정희의 제자였습니다. 

즉, 손재형은 추사의 제자였던 아버지를 둔 사람에게 세한도를 보여준 셈입니다.

오세창은 되찾은 세한도를 보고 눈물을 흘리며 다음 시를 썼다고 합니다.


완당노인 그림 한 장 그 명성 자자하더니

북경으로 동경으로 이리저리 방황했네.

일백년 인생살이 참으로 꿈만 같구나.

기쁨인가? 슬픔인가? 얻었는가? 잃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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