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6월 24일 금요일

일본 근대사 이 동네만 알아도 대충 파악 가능하다 1편 - 교토

 제목은 근대사라고 잡았지만, 오늘은 일본에서 근대의 시작으로 여기는 메이지유신(1868년) 이전 내용이 더 많이 들어갑니다.

왜냐하면 정치 중심지로의 교토는 1853년과 1854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군함들을 끌고 와 200년 넘게 이어진 도쿠가와 막부의 쇄국 정책을 무너뜨리고

미일화친조약을 맺고 개항을 한 1854년과, 메이지유신의 시작인 1868년 사이가 가장 전성기였기 때문입니다. 


일단 1854년 이전까지 교토는 1000년간 일본에서  덴노(천황)이 머무는 명목 상의 수도였고, 조정도 존재하고 신하들도 있었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실권은 없던 상태였고, 특히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막부(사무라이 정권)를 성립한 1603년 이래로는 더욱 막부의 강력한 통제 아래에 있었습니다.

즉 정치적 중심지는 에도(현재 도쿄)였고, 교토의 덴노와 조정은 그들만의 리그였던 셈입니다. 

이들의 역할은 일본 고유 신앙에 따라 신에게 제사 지내고, 예술을 하고, 전통 예절을 가르치는 정도였죠. 


근데 1854년 막부가 개항을 결정하면서 덴노와 조정, 나아가 다이묘(지방 영주)들에게 이 문제에 대해 상의를 합니다.

막부 입장에서는 200년간 지속된 쇄국 정책을 바꾸는 것이기 때문에 조정과 덴노의 의견을 물어본 것이었는데

문제는 이전에는 막부가 이런 상의조차 안해왔다보니, 조정에선 갑자기 이런 중책에 대한 의견을 내야하는 것에 난리가 납니다.

막부 입장에선 덴노와 조정이 수백년간 그래왔던 것처럼 외교 업무를 막부에 일임하는 것을 바랐지만

조정, 특히 당시 고메이 덴노(메이지 덴노의 아버지)는 개항 정책에 반대를 하면서 막부는 곤경에 처합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끝내 덴노의 허락을 받지 못한 채 막부는 미국과의 통상조약을 강행합니다. 


막부가 개항을 결정한 것은 의외로 막부의 현실 인식이 상당한 수준이었다는 것이 현재의 정설이라고 합니다. 

막부는 유일하게 교역을 하던 네덜란드를 통해 서양 세력의 수준, 목적, 무력에 대해 상당히 파악하고 있던 상황이었고

지금 서양 함대가 에도로 들어가는 바다를 봉쇄해버리면 막부 입장에선 도저히 막을 수 없고

수십만의 인구가 살던 에도는 물자가 봉쇄되는 순간 말라죽을 거라 생각해서 서양 세력이 요구하는 개항을 들어줄 수 밖에 없었고

동시에 막부 내부에서도 개항파들이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그에 비해 계속 개항을 반대한 고메이 덴노와 조정은 현실적인 감각은 거의 없이 '불타죽어도 오랑캐랑 싸워야한다.'는 식이었죠. 


문제는 현실론에선 막부가 타당하지만, 명분론에선 막부가 밀릴 수 밖에 없었다는 점입니다.

첫 번째는 위에서 말했듯이 덴노는 개항을 반대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막부가 덴노의 명령을 거스르는 형태가 되었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막부의 최고 지도자 쇼군은 원래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 오랑캐를 정벌하는 대장군이란 뜻인데

오랭캐들이랑 싸우라고 한 막부가 서양 오랑캐들과 손을 잡고 개항을 추진해버리는 꼴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막부의 존재가 뿌리부터 흔들리는 상황에서 하급 무사들을 중심으로 막부를 타도해야한다는 의견이 높아집니다. 

도쿠가와 막부 성립 후 막부는 반란 방지와 사회 통제를 위해 하급 무사들을 통제하려고 했고

그에 따라 하급 무사들은 어중간한 신분에 경제력도 없고, 신분 상승도 막혔기에 막부 체제에 불만을 가져왔습니다. 


여기에 위에 설명한 다이묘, 지방 영주들의 입장까지 들어가면 더 복잡해집니다. 

애초에 도쿠가와 막부가 생겼을 때 막부는 자신들에게 적대적이었던 다이묘들을 반란을 우려하여 에도에서 먼 쪽으로 영지를 줘버리면서 쫓아냅니다.

그 후 도쿠가와 막부가 후기에 들어서면서 통치 체제가 느슨해지자, 이 틈을 타서 밀무역을 통해 부를 습득하고 서양 문물을 들여오거나

막부의 눈을 피해 지역 내부에서 개혁 정책을 피면서 몰래몰래 힘을 키워나가는 다이묘들이 생겨나게 되는데

어차피 막부하곤 원래 사이도 안 좋았는데 거리까지 멀어서 통제도 잘 안되니 이들 입장에선 거리낄 게 없었던 겁니다.

또한 다이묘들은 실권은 없었지만 신분, 권위, 문화적 수준이 높았던 교토의 조정과 귀족들에게 줄을 대기 위해 돈을 바쳐가며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이런 모든 상황이 맞아떨어지자, 수백년간 정치에서 소외되었던 교토는 갑자기 정치적 중심지로 떠오릅니다.

서양 세력을 몰아내야 한다고 밀서까지 뿌려대면서 서양 세력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내던 고메이 덴노,

어떻게든 덴노를 설득시키기 위해 조정에 설득과 협박 등을 써가며 조금이라도 더 막부파를 심으려는 막부

그 사이를 눈치 보며 서서히 자기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지방의 다이묘들이 합세하고

막부에 불만이 있던 하급 무사들이 막부를 공격하기 위한 정치적 구호로 존왕양이, 즉 서양 세력과 손잡은 막부 대신 덴노가 권력을 쥐고 서양 오랑캐를 쫓아내야한다를 내세우며

교토로 진출하면서 개항파나 막부파에게 정치적 테러를 가합니다.

이런 자들을 유신지사, 양이지사라고 불렀고, 막부는 이런 테러를 일삼는 양이지사를 상대하기 위한 무력 집단을 만드는데 그게 신선조(신센구미)입니다. 

일본 만화나 드라마, 영화에서 나오는 신선조는 도쿄가 아니라 교토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집단입니다.

어릴 때 '바람의 검심' 많이 본 사람들이라면 주인공 히무라 켄신이 유신지사였고, 히무라 켄신의 라이벌인 사이토 하지메가 신선조였죠.

 

이런 격변 속에서 일어난 굵직한 사건의 시작 지점의 대부분은 교토였습니다. 

고메이 덴노의 지속적인 양이, 즉 서양 세력에 대한 공격 요구에 결국 막부의 최고 지도자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1863년에 교토로 상경합니다.

이전까지는 덴노와 조정을 상관하지 않고 정책을 펴던 막부가 교토로 상경한다는 건 결국 정치적 실권이 막부에서 서서히 조정으로 넘어가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죠. 

근데 재미있는건 고메이 덴노는 정작 양이 외에는 친막부 행보를 보였는데, 아마 보수적이었던 고메이 덴노가 기존 막부 체제가 무너지는 것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라 봅니다,

그리고 이는 막부가 그래도 어느 정도 교토에서 정치적으로 비빌만한 자산이 되기도 했습니다.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는 덴노와 조정에 양이를 맹세하지만, 서양 세력과 싸워봤자 진다는 걸 알았기에 속으로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고,

지방의 다이묘들 역시 현실파악은 하고 있었기에 움직이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습니다. 

딱 하나, 현재 야마구치현에 위치한 조슈 번(당시 일본의 지역 단위, 현재 현으로 바뀜)만이 극단적인 존왕양이 파벌들이 장악해서

군사를 동원해서 서양 함선을 공격하였는데, 그나마도 열받은 서양 세력들이 조슈 번을 공격해서 박살내버리는 바람에

조슈 번, 그리고 존왕양이파, 그리고 양이에 바람을 불어넣은 덴노까지 모두 정치적인 입지가 축소되고 맙니다.

이 때를 노려 친막부 온건파에 가까웠던 사쓰마 번(현재 가고시마현)이 조슈 세력들을 교토에서 몰아내고 자신의 영향력을 강화시킵니다. 

거기에 조슈 번은 불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병사들을 이끌고 교토 왕궁을 쳐서 정권을 잡으려는 무리수를 두다가

도리어 막부와 사쓰마 번의 역공을 받아 실패하고 역적이 되버립니다. 


막부는 조슈 번을 정벌하려고 했지만 힘이 부족하여 조슈의 존왕양이 강경파를 쫓아내고 친막부파를 지도부로 세우는 선에서 타협을 하고 후일을 기약하지만

타협을 했던 조슈에서 정변이 일어나 다시 강경파들이 정권을 잡아버립니다.

이 강경파들은 서양 세력에게 참교육을 당했기 때문에 서양 세력의 막강함을 깨닫고 개항파로 노선을 틀면서 동시에 막부 타도 노선은 바꾸지 않습니다.

사실상 일본에서 이 시기를 기점으로 개항에 반대하는 세력은 사라집니다. 그에 따라 계속 양이를 주장한 고메이 덴노도 힘을 잃습니다. 


막부는 다시 조슈를 정벌하려고 군사들을 동원해서 조슈를 공격하지만 문제가 발생합니다.

조슈가 사라진 교토에서 정치를 주도하려고 했던 사쓰마 번의 정치적 계책을 막부파이자 차기 쇼군 후보였던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정치력으로 번번이 무너뜨리면서

막부는 일시적으로는 교토 조정에서 정치적인 영향력을 지키는데 성공하지만

이에 열받은 사쓰마 번이 반막부파로 돌아서면서 토사 번(현 고치현) 출신 사카모토 료마의 중재로 조슈 번과 비밀리에 동맹을 맺고 조슈에게 신식 무기와 물자 등을 대여해주고,

조슈 내부도 개혁을 하며 군사력을 강화하자 막부의 조슈 정벌은 끝내 실패하고, 설상가상으로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사망합니다. (1866년 8월)

그리고 양이파이자 친막부파였던 모순적인 행보를 이어간 고메이 덴노도 곧이어 사망하면서 교토는 다시 정치적 격변을 맞이합니다. (1867년 1월)

막부에선 교토에서 정치력을 발휘하며 능력은 입증했지만, 막부 내부에서 취약한 입지를 가진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1867년 1월에 쇼군이 됩니다.

그리고 거의 비슷한 시기 16세의 나이로 고메이 덴노의 아들 무쓰히토가 메이지 덴노로 즉위합니다.

이제부턴 메이지 시대인 셈이죠. 



글이 너무 길어지니까, 나머지는 다음 시간에 하겠습니다. 

다음 내용은 어떻게든 막부를 이어보려는 새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와 친막부파,

그리고 막부를 무너뜨리고 새 덴노 메이지를 얼굴마담으로 새로운 정부를 만들려는 사쓰마, 조슈 등의 반막부파의 대결이 됩니다.

그리고 1868년 메이지유신을 기점으로 교토가 다시 정치적 영향력에 더해 수도라는 상징까지 잃게 되는 과정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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