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6월 24일 금요일

로마 가톨릭의 수호자가 된 프랑크족 왕 클로비스 이야기

 세계사 교과서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니케아 공의회'를 배우셨을겁니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로마제국에서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 기독교는 크게 2개 종파가 있었습니다.

대충 요약하자면 삼위일체설(성부,성자,성령은 하나다)을 주장하는 아타나시우스파.

그리고 신과 예수를 분리해서 주장한 아리우스파.

이 두 종파는 격렬한 논쟁(이건 전문적 영역이므로 저도 몰라서 패스) 끝에

아타나시우스파가 승리하면서 막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아리우스파의 교리가 훨씬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쉬웠기 때문에 

로마 안에서는 아리우스파의 세력이 잔존해있었고, 후에 이들이 이단으로 지목되어 박해당하자

게르만족에게 자신들의 교리를 포교했습니다. 

게르만족 입장에서는 신학적 논쟁이야 로마제국 안에서나 벌어지는 일이었고

이해가 간단한 아리우스파의 교리가 자기들 입맛에 맞았기 때문에

그리하여 대부분의 게르만족들은 아리우스파 기독교를 믿게 되죠.

거기에 더해 아타나시우스파의 로마 가톨릭을 믿었다간 서로마 황제나 교황 아래로 들어가는 셈이니

그에 따른 정치적 고려도 있었구요.


문제는 이 시기가 하필 서로마 제국의 국력이 기울던 시기였고

게르만족들은 로마 제국 안으로 대규모로 이주하던 시기였다는 것입니다. 

결국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옛 서로마 제국의 영토에는 수많은 게르만족 왕국들이 세워집니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이 이 게르만족들의 주류는 아리우스파였습니다.

즉, 로마 가톨릭 입장에서는 자신들을 보호해주던 서로마 제국은 사라지고

자기들이 이단이라고 박해하던 아리우스파들이 칼을 쥐어버린 셈이 되어버린 셈입니다.

자칫하면 아리우스파들에게 거꾸로 박해를 당할 판이었고, 실제로 일부 지역에선 그것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로마 멸망 이후 프랑스 지역에 정착한 게르만족들은 이제 그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벌였는데

그중에서도 프랑크의 왕 클로비스는 영리하면서도 굉장히 교활한 인물이었습니다.

클로비스는 프랑스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비열한 방법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이 과정에서 프랑스 지역의 가장 강력한 게르만 왕국을 세우게 됩니다.


근데 이 클로비스의 아내가 로마 가톨릭의 독실한 신자였고 개종을 권유합니다.

물론 종교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던 얍삽한 클로비스는 개종을 거부합니다만

한번은 전쟁에서 불리한 상황에 놓였다가 기적적으로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이 때 클로비스는 이것이 아내가 믿는 신의 가호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자신의 부하들과 함께 496년에 가톨릭의 세례를 받게 됩니다.

위기의 가톨릭 입장에서는 최고의 지원자가 등장하게 된 셈입니다.

어쩌면 교활한 클로비스는 이것을 노렸을수도 있는데

지배층의 주류가 게르만족일 뿐, 얼마전까지만 하더라도 서로마의 영토였던 클로비스의 왕국에서

현지인 대부분이 믿고 있던 가톨릭을 선택하는게 클로비스 입장에선 얻어낼 것이 많기 때문이었죠.

실제로 클로비스는 개종 이후 현지인들과 가톨릭 교회의 지지를 얻어낼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당시 성직자들은 소위 '배운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가톨릭 성직자들을 품으면서 동시에 그들의 능력을 왕국을 다스리는데 적절하게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정작 이 당시 이탈리아와 발칸반도를 지배하고 있던 동고트 왕국의 왕 테오도리크가 더 강대한 힘을 가졌고

비열한 클로비스보다 훨씬 더 훌륭한 통치를 펼치며 옛 로마 시민과 로마 가톨릭을 보호해줬지만

결국 아리우스파였기 때문에 끝내 옛 로마 사람들과 종교적으로 융합되지 못해 결국 왕국이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클로비스가 죽고 300년 후 서유럽의 최종승자가 프랑크 왕국이 되고

당시 프랑크 왕국의 왕이었던 샤를마뉴가 로마 교황에게 '로마 황제'라는 칭호를 얻음과 동시에

프랑크 왕국에 남아있던 아리우스파나 게르만의 토착종교를 모두 찍어누르고

가톨릭으로 강압적으로 개종시키면서 이후 서유럽의 종교문화=가톨릭이 되는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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