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6월 24일 금요일

일본 근대사 이 동네만 알아도 대충 파악 가능하다 1편 - 교토 (2)

 


새롭게 막부의 쇼군이 된 도쿠가와 요시노부에게 놓인 상황은 비관적이었고, 심지어 요시노부 역시 막부 체제엔 큰 애정이 없었습니다.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쇼군가에서 어릴 때부터 쇼군 후계자 중 하나로 지목받을만큼 똑똑한 인물이었지만 동시에 기반이 취약했죠.

요시노부는 미토 번(현재 이바라키현) 출신으로 도쿠가와 가문의 방계 출신에 어머니는 왕족 방계 출신이었습니다. 

미토 번의 도쿠가와 가문은 방계에서도 여러모로 급이 낮았고 또한 막부에 위협이 된 존왕양이 사상의 기반이 탄생한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요시노부는 교토에서 막부와 왕족간의 연계를 주장하는 '공무합체'파로 활동하여 조정과 덴노의 지지를 얻기도 했고

그와중에 반막부파를 꾸준히 견제해야하는 어려운 행보를 보입니다. 

물론 정치력이 뛰어난 요시노부는 교토 정치계에서 본인의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동시에 반막부파도 꾸준히 견제하는데 성공하지만

이래저래 복잡한 그의 행보 탓에 오히려 막부 내에서 요시노부를 불신하는 사람들도 늘어갑니다. 

그래서 쇼군이 될 당시에 막부 내부에선 요시노부가 쇼군이 되는 걸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출신지인 미토 번 역시 이전에 미토 번 존왕양이파들을 버렸던 요시노부의 행적 때문에 그를 지지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쇼군이 된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개항에 반대하던 고메이 덴노도 죽자 적극적으로 개항 노선에 나서는데 

반란을 일으킨 조슈에 관대한 처분을 내리고, 외국 공사들을 오사카에서 접견하고, 그간 계속 외교적인 문제였던 효고항(현재 효고현) 개항을 밀어붙여버립니다.

이는 사쓰마 번이 조슈 정벌에 대한 관대한 처분을 요구하면서 막부 책임론을 앞세우고, 효고항 개항을 문제 삼아 막부의 외교권을 조정에 빼앗으려는 계책을 눈치채고

한발 앞서서 사쓰마 번의 문제 제기를 봉쇄해버리면서 정국의 주도권을 본인이 끌고 가려는 계산이었죠.

결국 사쓰마 번은 아무 것도 못하고 요시노부의 계책에 말려버리는데, 이는 요시노부가 그간 사쓰마를 비롯한 반대파를 상대로 쓰던 방법이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막부 군사들에게 근대적 장비와 훈련을 제공하고, 막부를 근대적 행정체계로 개편하는 등의 근대화 개혁에 들어갑니다. 

하지만 구 체제를 유지하면서 하는 개혁이 늘 그렇듯이 속도는 지지부진했고, 막부 내부에서도 독단적인 요시노부의 결정에 의심과 불신이 커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요시노부의 측근들이 암살되며 그는 고립되어갑니다. 


그 가운데, 반막부파는 다시 한번 정치적 승부수를 던지는데 막부가 가진 실권을 조정에 반납하라는 요구를 합니다. 

막부는 당연히 거절할 것이고, 이것을 구실로 삼아 막부를 무력으로 공격할 속셈이었습니다. 

하지만 요시노부는 이 요구를 바로 받아들이고 조정에 막부의 권한을 반납해버립니다. 이것을 '대정봉환'이라 합니다. 

요시노부의 노림수는 이렇게 요구 사항을 바로 수락하여 반막부파의 명분을 없애는 동시에

이미 수백년간 실권이 없던 조정이 갑자기 권한을 받아봐야 제대로 나라를 운영할 수 없을 것이기에 결국 실권은 계속 자신이 쥘 수 있다는 것이었고

요시노부의 계산대로 조정은 일상적인 업무는 이전처럼 하라고 선언했고, 이에 따라 요시노부는 여전히 실권을 쥐는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요시노부 본인을 중심으로 새로운 정부를 구상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또 다시 요시노부에게 당한 반막부파는 더이상 기다리지 않고, 1867년 12월 9일에 쿠데타를 통해 왕궁을 장악합니다.

그리고 막부와 기존 정치 체제를 폐지하고 신정부 수립을 선포하죠.

오사카에 있던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쿠데타의 징후를 알고도 그냥 냅두었다고 합니다. 

위에 말했듯 존왕양이 사상의 기반이었던 미토 번 출신이어서 막부 가문임에도 막부 체제보단 왕정복고를 더 선호했다고 합니다. 

신정부는 정권을 잡자마자 도쿠가와 가문에 대한 처분 문제와 재정 문제로 내분을 겪기 시작했고,

정예병과 인재는 부족했지만, 재정이나 외교적으론 우위에 있었던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무력 대결을 피하며 신정부가 자멸하기를 기다립니다. 


문제는 그동안 꾸준히 요시노부를 의심했던 막부의 강경파들이 계속 무력 대결을 주장해왔고

신정부 역시 무력 대결밖에 방법이 없었기에 막부의 근거지인 에도에 사쓰마 낭인들을 파견해 살인, 강도 등 테러를 일삼으며 도발합니다.

이에 넘어간 막부 과격파가 에도의 사쓰마 번 저택을 불질러버리고

막부의 전쟁 불사 분위기를 도저히 누를 수가 없었던 요시노부는 친막부파 번들에 동원령을 내리면서 결국 그렇게 피하려고 했던 전쟁으로 휘말립니다. 

이것을 보신전쟁이라 부릅니다. 


해가 바뀐 1868년 1월 3일, 15000명의 막부군이 교토로 공격을 개시했고, 신정부의 수비군은 수천명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막부군의 지휘관들이 무능한 지휘로 도리어 전투에서 패배하고 맙니다. 

그리고 1월 5일, 신정부는 관군으로 인정받는 깃발을 받으며 동시에 막부군이 반란군이 되어버리자 막부군은 무너지기 시작했고,

애초에 전쟁을 할 생각이 없었던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오사카에서 배를 타고 에도로 떠나버립니다. 

막부의 패배와 쇼군의 후퇴 소식에 간을 보던 일본 서부의 다이묘들이 신정부의 편에 서기 시작하면서 전황은 막부에 불리해집니다. 


기선제압을 한 신정부군은 막부의 근거지인 에도로 향합니다.

문제는 신정부군이라 해봐야 사쓰마, 조슈, 토사, 사가 4개 번의 병사들이 주축인 소수였기에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여전히 건재했던 친막부파를 결집시키고, 근대화된 함대를 가진 막부 해군과 함께 에도에서 싸움에 나선다면 여전히 승패를 장담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애초에 전쟁에 소극적인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반란군이 되어버리자 싸움을 지속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1868년 3월 15일, 요시노부는 에도성에서의 항전을 포기하고 항복을 선택합니다.

항복의 댓가로 요시노부 본인과 도쿠가와 가문과 막부 인사들의 안전을 보장받았으며, 이후 공작 작위를 받고 76세까지 풍족하게 살다 사망합니다.


그렇지만, 막부에선 항복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에도를 탈출하여 친막부파가 많은 동북부 지역으로 가서 계속 전쟁을 이어나가려고 했고

이에 따라 전쟁은 1869년까지 계속 이어집니다. 

그리고 대충 전쟁 수습이 된 1868년 11월에 메이지 덴노가 도쿄(에도에서 이름이 바뀜)에 머물렀다 교토로 돌아오고

다음 해인 1869년 5월에 다시 도쿄로 갔다가 교토로 돌아오지 않으면서 막부 말기의 격변을 뒤로 하고 교토는 수도란 상징을 잃습니다.

물론 메이지 덴노와 조정은 교토 시민들의 반발 때문인지 당시에 공식적으로 '천도'하지 않고 도쿄로 떠났고

현재도 법적으로 명확히 도쿄를 수도로 정한다고 규정 지어놓지는 않았기 때문에

교토 사람들은 아직도 '엄밀히 말하면 여전히 교토가 일본 수도'라고 주장하곤 합니다. 




다음 글은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항복한 후에도, 항복을 거절하고 계속 동북부에서 전쟁을 이어나간 친막부파의 이야기와

친막부파의 중심축 중 하나였던 아이즈 번에 대한 이야기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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