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6월 24일 금요일

1853년과 54년, 일본의 모든 것이 뒤집어진 순간들.txt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쇼군이 되어 에도 막부를 세웁니다.

칼을 쓰는 무력집단인 사무라이들이 정치를 하는 막부 체제였지만

에도 막부는 정권을 잡은 후에 오히려 전투를 억누르기 위해 여러가지 조치를 취했고

이에 따라 사무라이들은 점점 무력집단에서 멀어져가고, 평화의 250년이 유지됩니다.


하지만 19세기에 들어와 세계 정세가 심상치않게 돌아간다는 것은 일본 역시 이리저리 알게 됩니다. 

일본을 막아주던 방어막인 바다에는 사방에서 서양의 배들이 출몰하여 이제 더이상 방어막이 아니라

적이 어디서든지 등장할 수 있다는 불안의 원인이 되었으며 이들은 가끔 통상을 요구하며 정박하기도 합니다.

물론 막부는 쇄국정책에 따라 이를 모두 거부하지만, 그렇다고 이들의 출몰은 끝나지 않습니다. 

또한 1840년 아편전쟁에서 청이 서구세력에게 패했다는 소식을 들으며 막부는 다시 충격에 빠집니다.

전통적인 동아시아 질서 아래에서 절대적인 1인자인 중국이 허무하게 패했다는 것은

당시 동아시아의 모든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일 수 밖에 없죠.

그들의 대포와 총이 일본을 향할지 모른다는 불안감, 그리고 계속 출몰하는 서양의 배들과 그들의 통상 요구로

막부는 부랴부랴 유일하게 개항된 도시 나가사키를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국방을 강화해보려 했지만

250년간의 평화 체제는 이미 확고하게 자리잡았고, 노력은 지지부진했습니다. 


그리고 1853년 4월 19일, 오키나와에 미국의 배 5척이 들어옵니다.

오키나와는 지금까지 가끔 외국의 배가 들어온 적이 있었지만 5척의 배가 들어온 건 처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함대는 6월 3일 도쿄의 코앞인 가나가와의 우라가 항구에 배 4척을 이끌고 입항합니다. 

함대의 대장인 페리 제독은 대통령의 국서를 가져왔다며 일본을 대표하는 고관과의 접견을 요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을 시에 무력으로 도쿄의 쇼군에게 직접 국서를 전달하겠다며 사실상 협박합니다. 


쇼군이 살던 도쿄, 당시 에도는 이 소식에 경악합니다. 

막부는 국법으로 외국과의 접촉을 금하고 있으나, 현재 이들을 거부했다간 전쟁이 벌어질 수 있으니

일단 국서를 받고 논의해보자는 의견을 모읍니다. 

그리고 지금 쇼군이 병중이라 지금은 결정하기 어렵고 내년에 다시 오라는 약속을 하고 미국 함대를 돌려보냅니다. 


근데 쇼군이 병중이란 건 핑계가 아니라 진짜였고, 6월 22일에 쇼군 도쿠가와 이에요시가 사망합니다. 

막부 내부에선 대체로 250년간 평화를 지켜온 일본이 미국과 전쟁을 해봐야 패배한다는 의견에는 일치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국을 하느냐, 아니면 쇄국을 유지하느냐로 의견이 좁혀지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막부는 200년간 하지 않았던 일들을 하게 됩니다. 

200년간 국정에 관한 모든 결단을 막부가 독점하고 있었으나 

개국에 대한 의견을 각 지역의 지배자들인 번주들에게 보내 의견을 물어본 것이죠.


번주들끼리도 의견이 갈립니다. 

이들 역시 미국과 싸워봐야 이기기 힘들다는 것에는 의견이 같았으나

차라리 일부 국가를 상대로 일부 지역만 개국을 하고 국방력을 강화하자는 개국파와

최대한 교섭을 끌어서 시간을 벌고, 그 사이에 국방력을 강화해보자는 개국유보파들이 나뉩니다.


그리고 교토의 조정에도 의견을 묻게 됩니다. 

교토에는 천년간 덴노가 살고 있었고, 여전히 귀족들과 조정도 존재했지만

에도 막부 이후의 모든 국사는 막부가 도맡아 처리하고 있었는데 

수백년만에 처음으로 막부가 조정에 의견을 물어오게 된 것이죠.

조정 내부에서는 대체로 쇄국론이 주였지만, 소수의 개국론자들이 있었고

7월 13일, 조정은 이후 미국 함대가 다시 올 경우 막부가 취해야할 조처를 미리 알려달라고 의견을 모은 후 막부에 전달합니다.

그리고 막부는 이를 수용하며 250년만에 조정의 의견이 국정에 반영됩니다. 


이렇게 일본이 뒤집어진 가운데 8월 17일에는 러시아 함대 네 척이 나가사키에 입항하여 러시아 황제의 서한을 막부에 보냅니다. 

여기엔 평화 우호, 그리고 당시 일본과 분쟁 중인 사할린 섬의 영토 문제 해결, 개항 요구가 담겨있었습니다. 

러시아는 미국의 통상 요구를 보고, 미국과 다르게 우리는 일본의 국법을 존중하여

당시 유일한 개항지였던 나가사키로 왔다며 일본에 좋은 이미지를 주려한겁니다. 

물론 답변이 없다면 바로 에도로 가겠다는 협박도 빼놓지 않습니다. 


나가사키의 러시아 황제의 서한은 바로 에도로 보내졌지만

에도는 죽은 쇼군의 상을 치르는 동시에 새로운 쇼군과 권력구도를 만드는데 정신이 없었습니다.

막부는 미국과 달리 조금 더 예의바른 러시아의 태도에 긍정적이었으나 

일부 반대파들의 의견에 부딪혀 결국 러시아에 대해서도 시간끌기를 하기로 결론내립니다. 

결국 러시아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고 해가 바뀐 1854년 1월 8일에 나가사키를 떠납니다. 


1853년 10월 23일, 새로운 쇼군으로 도쿠가와 이에사다가 오릅니다만

불행히도 그는 후에 뇌성마비 의혹이 있을 정도로 정신적, 신체적인 문제를 앓고 있었으므로 

일본은 사실상 쇼군 아래의 신하들이 통치하고 있었고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1854년 2월 13일 미국의 함대가 이번에는 9척이나 우라가항에 도착합니다.

미국에 단호한 태도에 이제는 시간끌기를 할 수도 없다는 걸 깨달은 막부는 쇄국과 개국의 갈림길에 섭니다.

결국 현실적으로 미국과 싸울 능력이 없었던 막부는 개국을 선택합니다. 

결국 1854년 3월 31일에 막부는 미일화친조약을 맺으면서 250년간의 쇄국정책을 끝내고

미국에 홋카이도 남단 끝 하코다테와 이즈 반도 끝의 시모다를 개항합니다.


그 6개월 후 1854년 9월 18일에는 러시아의 군함이 오사카에 2주간 정박합니다. 

오사카는 덴노가 있는 교토의 코앞이기 때문에 교토의 조정과 교토의 시민들은 혼란에 빠집니다. 

그리고 11월 3일부터 시모다에서 일본 막부와 협상에 들어갑니다.

이 시기에 지진과 쓰나미가 와서 러시아의 배가 파손되는 등의 일이 있었으나

결국 12월 21일에 러시아와도 화친조약을 맺으면서 미국에 개항한 하코다테와 시모다에 더해 나가사키까지 개항합니다. 



이 1853년과 54년의 일은 일본의 모든 것들을 뒤집어 놓는데요.

첫번째로는 일본이 250년간의 쇄국체제를 끝내고 드디어 개항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정도야 교과서에서도 다 나오는 내용이니 넘어가구요.

두번째로는 위에 적었듯이 개국 과정에서 막부가 200년간 독점적으로 국사를 관장한 전례를 깨고

지역의 번주들과 교토의 조정에 의견을 물었다는 사실입니다. 


막부의 쇼군은 원래 '정이대장군'으로 해석하자면 오랑캐를 정벌하는 장군입니다.

근데 정작 이 정이대장군과 막부 세력이 서양 오랑캐와 손을 잡는 풍경이 벌어지니

자연스레 막부의 의의가 뿌리부터 흔들리게 되는 것이죠. 

이를 통해 막부의 권위는 실추되고, 지방의 강력한 힘을 가진 번주들의 입김이 강해집니다.

이것은 이후 번주, 그리고 지방의 무사들이 중앙 정치에 다시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게 되었고

실제로 지방 세력이었으나 자체적인 근대화로 강한 힘을 가졌던 사쓰마(현재 가고시마), 조슈(현재 야마구치) 등의 세력들이 정치적으로 등장하여

막부를 타도하며 이후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주도하게 됩니다. 


또한 그간 소외되었던 조정에 의견을 물었던 전례 때문에 이후에도 막부는 조정에게 의견을 묻지 않을 수 없게 되는데

이는 자연스럽게 교토의 덴노의 목소리를 신경쓰지 않을 수 없게 만듭니다.

게다가 당시 덴노였던 고메이는 서양 세력들을 극렬하게 싫어하던 사람이었기에 막부 입장에서는 부담스럽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후 정국에 있어서도 고메이의 입김은 강했는데, 이것은 엉뚱한 방면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고메이는 서양세력을 싫어했지만, 어디까지나 막부를 통해 이들을 몰아내려는 생각을 했는데

막부가 자신의 윤허 없이 서양세력과 계속 조약을 맺자 화가 난 고메이가 서양 오랑캐를 쫓아내라는 칙명을 내리고

당시 일본의 양이파(쉽게 말해 서양 오랑캐를 몰아내자는 세력)들이 이에 반응하여

서양세력들과 관계를 맺는 막부를 타도하자는 방향으로 바뀌게 되는 거죠. 


마지막으로 위에 곳곳에 적었지만, 당시 일본의 지배층들은 의외로 상당히 현실적인 상황 판단을 하고 있었습니다.

막부는 서양 세력과 싸워 이길 수 없다는 것에는 의견이 모아져있었고, 지방의 번주들 역시 이 의견에는 모두 동의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단 자신들의 힘을 키워야한다는 의견에도 모두 동의하고 있었죠.

그 방법을 일단 시간을 끌어보고 힘을 모으느냐, 아니면 개국을 한 후에 힘을 모으느냐의 차이였죠.

그리고 시간을 끌어보자는 파들도 결국 서양의 무기와 물건이 필요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지방의 하급 무사들이나 일부 번들 위주로 서양오랑캐를 쫓아내자는 양이파들이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양이파의 본거지였던 사쓰마와 조슈가 일찌감치 서양 세력과 싸웠다가 패배한 후에 현실 인식을 하고

사실상 일본에서 개항 자체에 반대하는 세력들은 사실상 사라지게 되면서 

개항을 둘러싼 논쟁은 개국 후 10년만에 정리되어버리는 거죠. 

물론 이후에도 보신 전쟁과 세이난 전쟁 등 서구식 근대화의 후유증으로 내전이 크게 벌어지지만

일본의 서구식 근대화의 흐름은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집니다.



1853년과 54년에 일본이 받았던 충격과 그들이 내린 결정은 이후 일본사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키워드가 됩니다. 

나아가서 이후 동아시아사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니, 역사에 흥미가 있는 분이라면 이 시기를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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