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6월 26일 일요일

소스코드 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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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 24일 금요일

슈뢰딩거의 리모컨.txt

 양자역학은 어려운 개념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혼란을 줍니다.

고전물리학자들도 이해를 못했다고 하죠.

고양이 사고 실험으로도 유명한데 쉽게 말해

완전 밀폐된 공간에서 1시간 후에 50퍼센트의 확률로 작동하는 독극물 트랩이 있다면 1시간 후 공간을 개방한 후 고양이는 어떻게 되느냐라는 겁니다.

양자역학의 해석에 따르면 '고양이는 확인 전까지 삶과 죽음 모두 중첩된 상태인데 확인 후에야 삶인지 죽음인지 결정된다'라는 확률론에 기반한 이상한 결론에 도달합니다.

슈뢰딩거가 주장한 이 실험은 슈뢰딩거가 양자역학을 까기 위해 만들어져 오히려 양자역학을 더 유명하게 만들었죠.

 

 

근데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이 개념을 이미 겪고 있습니다.

TV를 켠채 눈을 감고 누워있는 부모님이 있습니다.

우리가 리모컨을 잡고 채널을 바꾸기 전까지 부모님은 '잠들어있다', 'TV를 보고있다' 상태가 중첩되어 있지만

우리가 채널을 바꾼 후에야 부모님이 잠이 든건지 'TV본다~'며 한마디 할지 확인할 수 있죠.

 

즉, 여기서 우리는 슈뢰딩거의 부모님이 눈감고 누워서 TV보는 습관이 없다는 결론을 낼 수 있습니다.

일본 육군의 뿌리 조슈 번

 일본 육군의 뿌리는 옛 조슈번, 현재 야마구치현이고

일본 해군의 뿌리는 옛 사쓰마번, 현재 가고시마현입니다.

일본 근현대사를 공부하려면 사쓰마, 조슈 이 두 지역은 꼭 알아둬야합니다.

 

특히 옛 조슈번, 현재 야마구치현 같은 경우에는 현재까지도 일본에 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지역입니다.

당장 일본 역대 총리 62명 중에 8명이 이 동네 출신인데, 야마구치현은 현재 인구 150만명도 안되는 지역입니다.

2등인 도쿄도 출신 총리가 5명인 것이랑 비교하면 엄청나죠.

재임기간으로 따지면 더 비중이 큰데

일본에 총리가 생긴 1885년부터 135년 동안 야마구치현 출신 총리가 해먹은 기간이 약 42년 정도 됩니다. 

즉 근대 일본의 3분의 1은 야마구치현 출신들이 다스렸단 이야기입니다.

면면들도 화려합니다.

초대 총리부터 야마구치현 출신인 이토 히로부미구요.

역대 일본 총리 최다 재임기간 기록 1, 2, 3등이 다 야마구치현 출신입니다.

(1등 아베 신조, 2등 가쓰라 타로, 3등 사토 에이사쿠)

 

이렇게 된 이유는 역시 메이지 유신 시절 조슈번이 육군을 차지해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까닭도 있고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정계의 흐름이 조슈 번의 영향력이 강해지게 바뀌어서입니다.

일단 메이지 유신 당시 일본의 무력 집단은 사쓰마와 조슈 파벌이 있었고

그 외에 문관파라 할 수 있는 집단들이 있었는데 사쓰마 출신 오쿠보 도시미치가 대표적이죠.

근데 사쓰마 파벌의 우두머리인 사이고 다카모리가 고향에서 반란을 일으키다 죽어서 사쓰마 파벌의 영향력이 줄은 사이에

조슈 번 출신인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자연스럽게 일본군의 꼭대기를 먹게 되고

문관파인 오쿠보 도시미치는 조슈에서는 비주류였던 온건파 이토 히로부미를 후계자로 낙점해서 

문관파과 군부 모두 조슈 번 출신인 이토 히로부미와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주무르게 되는 거죠.

 

그중에 이토 히로부미는 돈이나 파벌 만들기에는 별 관심이 없었으나

(대신 여자 관계가 더러워서 당대에도 이미지는 별로였는데 최근에는 더욱 별로가 됨)

조슈파이자 군부의 수장인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돈과 파벌 만들기 모두 관심이 많았던 사람이라서

육군에 부지런히 자기 파벌을 박아놓고, 총리를 하면서 정계에도 부지런히 자기 파벌을 박아넣으며

일본 군부와 정계 모두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는 원로로 행세합니다. 

사실 일본 군국주의의 뿌리라고 볼 수 있는 인물이기도 하죠.

그리고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후예들이 일본 육군을 먹고, 이후 정계도 진출하는데

데라우치 마사타케, 하세가와 요시미치, 우가키 가즈시게(조슈 출신은 아님) 등입니다.

한국 근현대사를 아는 분들이라면 익숙한 이름일텐데 조선 총독부 총독들입니다.

일본 육군 대장출신들이 조선총독을 맡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가키가 군축을 시도하다가 도리어 육군 파벌의 반발에 부딪혀 총리에 오르는데 실패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잃고, 나중에는 오히려 조슈벌 반대파들이 육군을 먹으면서 몰락합니다. 

근데 이 조슈 파벌을 밀어내고 육군을 먹은 애들의 면모를 살펴보면

차라리 조슈 파벌은 돌아가는 머리라도 있었지 얘들은 능력은 없는데 더 전쟁광들이라서......

당장 우가키 가즈시게만 하더라도 만주와 내몽골은 일본이 먹어야하지만

중국 본토와 싸우는 중일전쟁은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했으나

그 반대편에서 열심히 중일전쟁의 불씨에 기름을 붓던게 도조 히데키였고

도조 히데키는 그 멍청한 자기 측근들과 태평양전쟁까지 일으키면서 일본 제국을 몰락시키죠.

엔카와 트로트의 관계에 대해서

 제가 마침 엔카와 트로트를 다룬 책이 있어서 

그 책에 나온 내용을 한번 정리하겠습니다. 

강헌이 쓴 '전복과 반전의 순간'입니다.



1. 일단 엔카에 대해서 정의해야하는데, 엔카는 일본의 음악입니다.

하지만 일본의 전통음악은 아닙니다. 

서양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일본의 근대 음악입니다. 

그리고 최초의 엔카는 우리 식으로 쉽게 표현하면 운동권의 민중가요였습니다.

근대의 자유민권론자들이 민중계몽을 위해 만든 것이 엔카의 시초였는데

당연히 국가의 철퇴를 두들겨 맞고, 사랑 노래를 하는 유행가로 바뀐 겁니다.

우리가 아는 엔카의 이미지는 이 때부터입니다. 


2. 엔카의 특징은 크게 2가지를 꼽으면 '요나누키 단음계'와 '2박자 기반의 음악'입니다.

요나누키 음계는 일본의 5음계 방식인데 '도, 레, 미, 솔, 라'을 사용합니다.

근데 이 5음계는 7음계를 쓰는 서양을 제외한 세계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됩니다.

우리나라 민요도 5음계를 쓰고, 현대 대중음악의 중요한 뿌리 중 하나인 흑인음악 블루스도 5음계입니다.

근데, 이 요나누키 장음계를 단조로 바꾸면 '라, 시, 도, 미, 파'가 되는데

이것이 흔히 엔카에서 쓰는 요나누키 단음계가 됩니다.

이걸 쓰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뽕끼'가 확 살아납니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전통적으로 2박자 기반의 음악을 선호했습니다.

즉, 1번과 다시 연계하면 '엔카=요나누키 단음계와 2박자를 기반으로 하는 일본의 근대 음악'입니다. 



3. 그러면 한국 전통음악의 특징을 살펴봐야할텐데

한국 역시 5음계를 사용하는데, 단조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계면조 같은 경우에는

'라, 도, 레, 미, 솔'을 사용합니다. 다시 말해 요나누키 단음계와 묘하게 음이 다릅니다.

그리고 한국은 전통적으로 3박자 기반의 음악을 선호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최초로 나온 트로트는 거의 3박자 기반이었습니다.



1928년에 나온 '황성옛터'는 잘 들어보면 3박자 입니다. 쿵작작 쿵작작이죠.

근데 음계는 요나누키 단음계를 사용해서 만들었습니다.



근데 1935년에 나온 '목포의 눈물' 같은 경우에는 같은 요나누키 단음계를 쓰지만 2박자 기반의 음악이죠.


잘 들어보면 우리가 흔히 트로트 하면 쓰는 쿵짝 쿵짝 쿵짜작 쿵짝 박자입니다. 

그리고 '목포의 눈물' 뒤에 나오는 거의 대부분의 트로트는

여러분이 잘 아는 쿵짝 쿵짝 쿵짜작 쿵짝의 2박자 기반입니다. 


그렇다면, 한국 전통적인 음계를 사용해도 트로트나 엔카와 비슷하지 않을까 하실텐데

한국 스타일의 단조 5음계를 사용한 음악이 있습니다.



1974년에 발매된 '미인'인데, 같은 단조 5음계를 사용했지만

이건 요나누키 단음계(라, 시, 도, 미, 파)가 아니라 국악 계면조의 '라, 도, 레, 미, 솔'을 썼습니다. 

상당히 비슷합니다. 하지만, 미묘하게 다른 느낌이 들죠.


하나 더 가져오겠습니다.



1934년에 만들어진 '그리운 강남'이란 곡인데, 역시 '라, 도, 레, 미, 솔'을 썼습니다.

잘 들어보면 같은 단조 5음계라서 트로트와 얼핏 비슷하지만, 국악의 느낌도 나죠.




강헌의 결론은 트로트는 일본 엔카의 영향을 받은게 맞다는 겁니다. 

하지만 일본에서 탄생했지만, 이미 한국 사람들의 정서에 깊이 자리 잡았고

특이하게도 한국 사람들이 더 소화를 잘하는 장르가 되었다. 입니다. 

망해가는 서로마제국의 장군 스틸리코의 눈물나는 일대기

 외부적으로는 게르만족의 대거 남하를 겪고 내부적으로는 망해가던 로마 제국을 어떻게든 호흡기 붙여 살려내던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395년 사망.


로마가 서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으로 갈라지고 테오도시우스가 죽어가며 10살짜리 서로마 황제 호노리우스를 스틸리코 장군에게 맡기면서 사실상 서로마의 운명이 스틸리코에게 달림.


그리고 이어지는 눈물나는 스틸리코의 일대기.


395년 고트족의 알라리크가 거병하여 동로마 지역의 그리스를 공격. 테오도시우스의 동로마 정예군을 가졌던 스틸리코가 그리스로 와서 방어. 그와중에 그 정예군은 원래의 동로마로 귀환. 시작부터 정예군이 사라짐.


397년 알라리크가 또 그리스를 침공. 스틸리코가 또 막음. 근데 이후 동로마가 알라리크의 협박으로 군사적 요충지 일리리쿰 사령관으로 알라리크를 임명함. 근데 일리리쿰은 서로마땅이란 기막힌 상황. 

그리고 이와중에 로마의 식량 공급지 북아프리카에서 반란이 일어남. 그래도 조기 진압에 성공


401년.  반달족 등의 이민족이 북이탈리아를 침공. 스틸리코가 막으러 감. 근데 이 모든 배후에는 또 알라리크가 있었고, 스틸리코가 없는 사이 일리리쿰에서 착실하게 힘을 키운 알라리크가 또 이탈리아를 침공. 


402년. 스틸리코가 급하게 이탈리아 바깥에 있던 병력을 싹 긁어모아 호노리우스 황제를 구출하고 알라리크를 이김.


403년. 또 알라리크와 싸워 이기지만 알라리크와 휴전협정을 맺고 돌려보냄. 기껏 고생했더니 다 이겨놓고 휴전협정 맺었다고 로마에서 비난여론이 생김.


405년. 고트족의 라다가이수스가 이탈리아를 침공. 이탈리아를 지키기 위해 프랑스, 영국 지역을 포기하고 그 지역의 병사들까지 다 끌어모았음에도 군사가 모자랐던 스틸리코는 노예까지 끌어모아 겨우 이김.

그러나 결국 이탈리아를 지키기 위해 포기한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스틸리코에 대한 로마 여론은 더 나빠지고, 멍청이로 유명한 호노리우스 황제도 스틸리코를 견제하기 시작함.


408년. 동로마 황제가 죽자, 서로마 황제 호노리우스가 동로마에 영향력을 행세할 생각을 함. 이 때 알라리크가 동맹을 요청하며 금을 요구하자 현실적으로 게르만족을 막을 수단이 필요했던 스틸리코가 제안을 받아들이고, 로마 여론은 스틸리코를 야만족과 손잡았다고 비난.

그와중에 호노리우스 황제가 스틸리코가 자기 아들을 황제로 만들러고 한다고 의심해서 결국 스틸리코파를 숙청하고 본인도 처형당함.


서로마 제국 최악의 적이었던 서고트족의 알라리크 일대기 1편

 지난 글에는 망해가던 서로마 제국을 어떻게든 살려보려 애쓴 스틸리코의 일대기를 다뤘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스틸리코의 숙적이었던 알라리크의 이야기를 다루게 되었는데

스틸리코와 서로마 제국의 입장에서 알라리크는 최악의 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알라리크를 따로 연구해보면 알라리크 또한 상당히 매력적인 인물입니다. 


노쇠한 로마 제국의 역량은 나날이 감소하는 반면에, 게르만족은 로마의 영향을 받아 점점 강력해져갑니다.

결국 로마 제국은 게르만족을 로마의 비정규군으로 포함시키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게르만족들이 로마군과 함께 싸우게 되고,

알라리크 역시 어릴 때부터 로마 제국과 함께 전장에서 싸웁니다.


395년, 로마의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사망하자, 제국은 동로마와 서로마로 나뉘어지고

알라리크는 로마의 장군이 되기를 희망했으나, 동로마에서 거부합니다.

또한 동로마가 발칸반도에 거주하던 서고트족을 엉망으로 통치하자 이에 반발한 서고트족이

알라리크를 지도자로 추대하면서 알라리크는 서고트족을 책임지게 됩니다.

알라리크와 서고트족이 가장 원하는 건 로마 제국 안에 자신들이 정착할 땅을 얻는 것이었고

이것을 위해 약탈과 협박, 협상 등 온갖 수단을 사용합니다. 


알라리크는 교활하고 뛰어난 전략가였습니다. 

알라리크는 동로마의 주력이 터키 일대에 있고,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정예군은 서로마에 있다는 걸 파악하고

빈집인 그리스 지역을 약탈합니다.

하지만,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정예군을 이끌고 도착한 서로마 장군 스틸리코에게 패배하여 물러납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동로마가 다시 혼란에 빠지자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은 알라리크는

다시 그리스 지역을 공격하기 시작했으나, 이 공격 역시 스틸리코가 저지합니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던대로 뛰어난 전략가였던 알라리크는 서로마와 동로마의 허술한 틈을 파고듭니다.

바로 동로마 궁정을 협박해서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일대의 군사령관 자리를 얻어낸 것이죠.

그런데 이 지역은 원래 동로마 지역이 아니라 서로마 지역이었습니다.

즉 알라리크는 서로마 지역의 일부를 관리하게 된 동시에 동시에 동로마의 장군이란 지위를 얻습니다.

서로마와 동로마의 복잡한 정치적 관계 속에서 절묘한 이득을 취한 셈이죠.

게다가 이 지역은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기에 알라리크는 자신의 군사력을 강화시킬 기회를 얻습니다.


401년, 알라리크는 이번에는 서로마를 공격할 기회를 노리지만,

서로마에는 이미 자신을 두번이나 막아낸 스틸리코가 있었기 때문에 알라리크는 머리를 씁니다.

동고트족의 라다가이수스와 다른 게르만족을 꼬드겨 서로마를 공격하게 하여

스틸리코를 이탈리아에서 벗어나게 한 후, 빈집이 된 이탈리아를 공격하기로 합니다.

스틸리코는 게르만족을 막기 위해 병사들을 이끌고 북쪽으로 향하고,

빈집이 된 이탈리아로 알라리크는 서고트족을 이끌고 쳐들어갑니다.

그리고 밀라노에 머물던 멍청이 황제 호노리우스를 잡기 직전까지 갑니다.

그러나 게르만족을 재빠르게 제압한 스틸리코가

다시 소수부대만 이끌고 다시 이탈리아로 남하하여 호노리우스를 구출한 후

자신이 앞서 꺾은 게르만족의 군대를 흡수하고 여기에 프랑스와 영국 지역의 로마군까지 긁어모아

알라리크를 공격하고, 알라리크는 다시 스틸리코에게 패배하고 맙니다.


스틸리코를 이길 수 없다는 걸 알았던 알라리크는 후일을 도모하며 스틸리코에게 화의를 신청하나

스틸리코는 이걸 역으로 활용해 화의를 하는 척 몰래 알라리크를 공격합니다.

여기서 알라리크는 자신의 주력을 거의 잃고 몸만 살아 돌아가게 됩니다. 


알라리크는 스틸리코와 4번에 걸친 싸움에서 모두 패배한 후 

스틸리코와 더 싸우는 대신 화해하고 동맹이 되는 방향으로 노선을 정합니다.

스틸리코 역시 멍청이 황제와 씨가 말라버린 인재들, 끊임없는 이민족의 침입으로 인하여 

이탈리아를 방어하기 위해 프랑스와 영국 지역을 포기할 정도로 급한 상황이었습니다. 

거기에 동고트족의 라다가이수스가 405년 서로마 제국에 쳐들어오자

스틸리코는 병사들이 없어서 노예들을 해방시켜 싸울 정도로 한계에 닥친 상황이었죠.


결국 알라리크는 망해가곤 있지만 스틸리코가 있는 한 이길 수 없는 서로마와 동맹을 맺고

자신들이 그렇게도 원하는 정착을 할 수 있는 전략을 생각했고

스틸리코 역시 강력한 서고트족을 동맹으로 삼아 서로마의 안보위협을 줄이는 동시에

동로마의 장군 신분인 알라리크를 이용해 동로마와의 관계에도 써먹어보려고 했습니다.


결국 408년 동로마의 황제였던 자기 형이 죽은 틈을 타 멍청이 호노리우스 황제는 동로마에 껄떡대기 시작했고

알라리크는 스틸리코에게 서로마와 동맹을 맺는 댓가로 금을 요구하는 제의를 합니다.

스틸리코는 로마 시민들의 반발에도 알라리크의 제의를 받아들이죠.



그런데, 그 직후 멍청이 호노리우스 황제가 사고를 치면서 상황은 전혀 다르게 전개됩니다.

그 이야기까지 적으면 글이 너무 길어지니까 다음 시간에......

로마 가톨릭의 수호자가 된 프랑크족 왕 클로비스 이야기

 세계사 교과서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니케아 공의회'를 배우셨을겁니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로마제국에서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 기독교는 크게 2개 종파가 있었습니다.

대충 요약하자면 삼위일체설(성부,성자,성령은 하나다)을 주장하는 아타나시우스파.

그리고 신과 예수를 분리해서 주장한 아리우스파.

이 두 종파는 격렬한 논쟁(이건 전문적 영역이므로 저도 몰라서 패스) 끝에

아타나시우스파가 승리하면서 막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아리우스파의 교리가 훨씬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쉬웠기 때문에 

로마 안에서는 아리우스파의 세력이 잔존해있었고, 후에 이들이 이단으로 지목되어 박해당하자

게르만족에게 자신들의 교리를 포교했습니다. 

게르만족 입장에서는 신학적 논쟁이야 로마제국 안에서나 벌어지는 일이었고

이해가 간단한 아리우스파의 교리가 자기들 입맛에 맞았기 때문에

그리하여 대부분의 게르만족들은 아리우스파 기독교를 믿게 되죠.

거기에 더해 아타나시우스파의 로마 가톨릭을 믿었다간 서로마 황제나 교황 아래로 들어가는 셈이니

그에 따른 정치적 고려도 있었구요.


문제는 이 시기가 하필 서로마 제국의 국력이 기울던 시기였고

게르만족들은 로마 제국 안으로 대규모로 이주하던 시기였다는 것입니다. 

결국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옛 서로마 제국의 영토에는 수많은 게르만족 왕국들이 세워집니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이 이 게르만족들의 주류는 아리우스파였습니다.

즉, 로마 가톨릭 입장에서는 자신들을 보호해주던 서로마 제국은 사라지고

자기들이 이단이라고 박해하던 아리우스파들이 칼을 쥐어버린 셈이 되어버린 셈입니다.

자칫하면 아리우스파들에게 거꾸로 박해를 당할 판이었고, 실제로 일부 지역에선 그것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로마 멸망 이후 프랑스 지역에 정착한 게르만족들은 이제 그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벌였는데

그중에서도 프랑크의 왕 클로비스는 영리하면서도 굉장히 교활한 인물이었습니다.

클로비스는 프랑스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비열한 방법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이 과정에서 프랑스 지역의 가장 강력한 게르만 왕국을 세우게 됩니다.


근데 이 클로비스의 아내가 로마 가톨릭의 독실한 신자였고 개종을 권유합니다.

물론 종교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던 얍삽한 클로비스는 개종을 거부합니다만

한번은 전쟁에서 불리한 상황에 놓였다가 기적적으로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이 때 클로비스는 이것이 아내가 믿는 신의 가호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자신의 부하들과 함께 496년에 가톨릭의 세례를 받게 됩니다.

위기의 가톨릭 입장에서는 최고의 지원자가 등장하게 된 셈입니다.

어쩌면 교활한 클로비스는 이것을 노렸을수도 있는데

지배층의 주류가 게르만족일 뿐, 얼마전까지만 하더라도 서로마의 영토였던 클로비스의 왕국에서

현지인 대부분이 믿고 있던 가톨릭을 선택하는게 클로비스 입장에선 얻어낼 것이 많기 때문이었죠.

실제로 클로비스는 개종 이후 현지인들과 가톨릭 교회의 지지를 얻어낼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당시 성직자들은 소위 '배운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가톨릭 성직자들을 품으면서 동시에 그들의 능력을 왕국을 다스리는데 적절하게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정작 이 당시 이탈리아와 발칸반도를 지배하고 있던 동고트 왕국의 왕 테오도리크가 더 강대한 힘을 가졌고

비열한 클로비스보다 훨씬 더 훌륭한 통치를 펼치며 옛 로마 시민과 로마 가톨릭을 보호해줬지만

결국 아리우스파였기 때문에 끝내 옛 로마 사람들과 종교적으로 융합되지 못해 결국 왕국이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클로비스가 죽고 300년 후 서유럽의 최종승자가 프랑크 왕국이 되고

당시 프랑크 왕국의 왕이었던 샤를마뉴가 로마 교황에게 '로마 황제'라는 칭호를 얻음과 동시에

프랑크 왕국에 남아있던 아리우스파나 게르만의 토착종교를 모두 찍어누르고

가톨릭으로 강압적으로 개종시키면서 이후 서유럽의 종교문화=가톨릭이 되는 셈이죠. 

클레오파트라의 인종에 대한 여러가지 추측

 역사적인 미인으로 꼽히는 대표적인 인물이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입니다.

그러다보니 클레오파트라가 어떻게 생겼느냐는 끊임없는 역사 애호가들의 떡밥입니다.

근데 이것도 찾아보니 상당히 떡밥이 많더라구요.


일단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클레오파트라의 이미지는 아랍 스타일 여성+고대 이집트 복장입니다.

현대 이집트의 인종과 고대 이집트의 이미지의 짬뽕이라고 할 수 있죠.

실제로 대부분 클레오파트라를 다룬 영화나 매체에서도 이런 이미지를 살리고 있구요.

구글에 '클레오파트라'를 검색하면 거의 비슷한 이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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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어쌔신 크리드 : 오리진'에서 묘사한 클레오파트라의 이 이미지가 대부분 익숙하실 겁니다. 


혹자는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 이집트는 아프리카, 아프리카는 흑인, 그러니까 클레오파트라는 흑인이라는

굉장히 논리적(?)인 주장을 제시하기도 하지만, 그냥 대부분은 우스갯소리로 받아들이는 느낌입니다.

아프리카에서도 지중해를 낀 북아프리카 지역은 인종적으론 백인들에 가깝죠. 피부는 유럽인들보단 어둡긴 해도.

물론 지금도 클레오파트라 흑인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연구를 하곤 있는데 글쎄요......



근데 우리가 놓치는 사실이 하나 있는데

클레오파트라가 속한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가는 우리가 흔해 생각하는 고대 이집트와는 관련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일단 이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시조인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그리스 북쪽 지역인 마케도니아의 귀족입니다.

그는 마케도니아의 그 유명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친구였고, 알렉산드로스를 따라 장군으로 활동합니다.

그리고 알렉산드로스가 사망한 후, 그 휘하의 장군들이 그 넓은 땅을 분할해서 통치하기로 하는데

프톨레마이오스는 오늘날 이집트와 리비아 지역을 차지합니다.

즉 프톨레마이오스 왕가는 이집트 핏줄이 하나도 섞이지 않은 그리스 가문이었고

이들은 이후에도 자신들의 정체성을 이집트가 아니라 그리스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당시에도 2000년이 넘는 기간동안 정체성이 형성된 이집트를 지배하는데는 적절한 타협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들은 그리스인이지만, 이집트의 문화를 일부분 받아들이기로 합니다.

즉 기존의 이집트 신들을 숭배하는 동시에 이집트의 기득권과 손을 잡고

동시에 이집트 사람들에게 나설 때는 과거 파라오의 복장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집트의 전통에 따라 프톨레마이오스 왕가는 근친혼을 합니다.

(그리스 문화권은 원래 근친혼을 금기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여왕이 클레오파트라죠.


정리하자면, 그리스인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가 이집트에 2300년전 터를 잡고 왕조를 세우고

그 후손들은 이집트의 전통에 따라 근친혼을 하면서 약 300년 가까이 그리스인의 핏줄을 유지합니다.

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왕인 클레오파트라 역시 이집트 대중 앞에선 고대 이집트의 복식을 했겠지만

실제로는 그리스인 생김새의 미녀라고 보는게 가장 적절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에 얽힌 여러 이야기들

 역사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추사 김정희에 대해서 한번쯤 들어봤을겁니다.

보통 김정희는 그가 만든 글씨체인 추사체로 많이 언급되는데

실제로 김정희는 당시 문인 예술가들이 갖춰야할 시, 서, 화에 모두 능한 사람이었고

자부심도 굉장히 강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남아있는 그림 작품 중에 '세한도'는 국보로 지정될 정도의 그림입니다.


그런데 세한도를 살펴보면 도저히 잘 그린 그림이라 할 수 없습니다.

원근법도 안맞고, 그림 초점도 잘 안맞는 느낌이죠.

그리고 집 한채와 나무 정도만 그려져있는  매우 간결한 그림입니다.

그렇지만 이 그림은 지금 국보로 지정되어있을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일단 위에 적었듯이 김정희는 절대 그림을 못그리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당대의 화가들에게 그림을 가르쳐줄 정도였고, 특히 흥선대원군의 유명한 난초 그림을 직접 가르쳐준 사람이죠.

즉, 김정희는 그림을 못그려서 저렇게 그린 것이 아니라, 무슨 이유가 있어서 저렇게 그린 것이죠.


김정희는 명문가의 후손이었고, 벼슬도 상당히 높은 자리까지 오르지만

세도가인 안동김씨를 건드려서 화를 입은 관리 윤상도와 관련이 있다는 이유로 엮여서

제주도로 8년간 유배를 떠나게 됩니다.

명문가로 평생을 지낸 금수저 김정희의 입장에서 제주도 유배는 굉장히 힘겨운 일이었는데

한번은 제자였던 이상적이 청나라에서 구해온 서책 약 100여권을 가지고 제주도의 김정희를 찾아옵니다.

죄인과 엮이는 것이 좋을 것이 없음에도 청나라까지 가서 서책을 구해온 제자가 김정희는 고마웠습니다.


김정희는 이런 본인의 처지를 그림으로 녹였는데, '세한'은 논어에서 가져왔습니다.

'한겨울 추운 날씨가 되어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즉, 시련을 겪을 때 비로소 그 사람의 진면목이 보인다는 뜻이죠.

또한 세한도의 발문을 보면 김정희가 잘나갈때나 유배생활을 할 때나

태도가 바뀌지 않고 자신을 대해주는 이상적에 대한 고마움이 묻어나옵니다. 

이런 의미를 그림으로 녹여냈기 때문에, 세한도는 높은 가치를 가지게 되었고

이상적이 다시 청나라로 넘어가 청나라 문인들에게 세한도를 보여주자

그것을 본 청나라 문인들이 감탄하여 감상평을 적었습니다.

즉, 세한도의 가치는 당대에 보편적으로 인정받았던 것이죠.


그런데 이 세한도는 제자인 이상적이 죽은 후에 이런저런 과정을 거치다가 

북경으로 건너가게 되고, 경성제국대학의 교수였던 후지츠카 지카시가 구입합니다.

후지츠카는 '조선에서 청나라 문화의 유입과 김정희'란 주제로 동경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을 정도로

김정희 애호가였으며, 그가 조선에서 모은 김정희의 예술품만 수천개가 넘었다고 합니다.

후지츠카는 이 세한도를 매우 아꼈는데, 이 세한도를 돌려받기 위해 조선에서 한 사람이 일본으로 건너갑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그 '서예'라는 단어를 최초로 만든 서예가 손재형이었습니다.


손재형은 1944년에 도쿄로 건너가서 짐을 풀고 매일 아침 저녁으로 후지츠카를 찾아가 세한도를 달라고 요청합니다.

1944년이면 태평양전쟁 막바지로, 이미 도쿄에 폭격이 개시될 때였는데

손재형은 폭격을 아랑곳하지 않고 후지츠카의 집을 매일 두 차례 방문합니다.

손재형의 끈질김에 후지츠카는 결국 아들에게

"내가 죽거든 손재형에게 아무 대가를 받지 말고 세한도를 돌려주어라."라고 합니다.

하지만 폭격은 점점 심해지고, 손재형은 아랑곳않고 계속 후지츠카를 찾아옵니다. 

결국 후지츠카는 전쟁통에 위험을 무릅쓰고 온 손재형에게 세한도를 돌려주게 됩니다.

그리고 손재형이 세한도를 돌려받고 조선으로 돌아간 후, 도쿄에는 미군의 대공습이 벌어지고

후지츠카의 서재가 폭격에 불타버리면서 후지츠카가 소장한 김정희의 작품 상당수가 소실되었고

손재형의 노력이 없었다면, 어쩌면 우리는 세한도를 영영 보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손재형은 귀국 후에 위창 오세창을 찾아가 세한도를 보여줍니다.

위창 오세창은 독립운동가이자 예술에 조예가 깊은 걸로 유명한 인물이었는데

오세창이 예술적 안목을 가르친 인물이 그 유명한 간송 전형필입니다.

근데 오세창의 아버지는 역관 오경석이었고, 이 오경석은 추사 김정희의 제자였습니다. 

즉, 손재형은 추사의 제자였던 아버지를 둔 사람에게 세한도를 보여준 셈입니다.

오세창은 되찾은 세한도를 보고 눈물을 흘리며 다음 시를 썼다고 합니다.


완당노인 그림 한 장 그 명성 자자하더니

북경으로 동경으로 이리저리 방황했네.

일백년 인생살이 참으로 꿈만 같구나.

기쁨인가? 슬픔인가? 얻었는가? 잃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