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6월 24일 금요일

고대 브리튼 제도의 복잡한 민족이주 역사.txt

 브리튼 제도는 현재 영국입니다.

고대 브리튼 제도는 근대 이후 영국에 비해 알려져있지는 않지만 유럽의 다른 나라들 못지 않게 상당히 복잡합니다.

특히 민족들이 얽히면서 더 복잡해지죠.


1. 토착민들이 사는 곳에 켈트족이 이주(철기 이후)

2. 로마인들의 정복으로(43년), 로마에 우호적이었던 켈트족은 브리튼족으로 분류, 반대한 켈트족은 스코틀랜드로 이주.

3. 4세기 이후 로마가 철수하고 게르만족의 일부인 앵글족이 들어와서 브리튼족을 공격.

4. 브리튼족이 색슨족을 용병삼아 앵글족을 방어하려했으나 색슨족도 눌러앉아 브리튼족을 공격.

5. 덴마크쪽의 주트족도 들어오고 앵글족 3왕국, 색슨족 3왕국, 주트족 1왕국 총 7왕국체제가 5세기경 생김.

6. 7왕국이 색슨족의 웨식스로 통일되나 곧 분열되고 9세기에 덴마크쪽에 살던 데인족이 이주해서 공격. 이 과정에서 앵글로색슨족의 정체성이 형성.

7. 11세기까지 앵글로색슨족이 데인족과 싸우고 잉글랜드 왕국이 통일됨. 근데 바로 노르망디 공국의 월리엄이 노르만족을 데리고 공격해서 잉글랜드를 차지함.


요약하자면 켈트족이 오고, 로마인이 왔다가고, 앵글족과 색슨족, 주트족이 와서 로마화된 켈트족을 삥뜯으며 싸우다가, 데인족이 와서 앵글로 색슨과 또 치고박고 싸우고 1066년 노르만 왕조가 쳐들어와 잉글랜드를 먹는 개판의 역사였습니다.

유럽민족사는 역시 한국인들에겐 쉽지 않군요.


각 나라별 식탁에서 빡치게 만드는 방법.txt

 


한국인 : 밑반찬을 돈주고 판다.

일본인 : 덮밥을 비벼준다.

중국인 : 차나 미지근한 물 대신 냉수만 준다.

프랑스인 : 프랑스 와인을 까며 다른 나라 와인을 준다.

이탈리아인 : 이탈리아 요리라며 미국식 피자, 파스타를 준다.

독일인 : 독일 맥주는 별로라고 말한다.

체코인 : 맥주는 독일이 최고 아니냐고 한다.

미국인 : 저염 저지방식으로 조금만 준다.

러시아인 : 보드카와 마요네즈를 주지 않는다.

폴란드인 : 보드카는 러시아가 최고 아니냐고 한다.

오스트리아인 : 캥거루 먹어봤냐고 한다.

영국인 : 영국 가정식만 주고 티타임은 안준다.

(영화계 유머) 미국의 달 착륙 연출 음모론.txt

 



1960년대 미국과 소련과의 우주경쟁이 심하던 시절.

미국은 소련보다 먼저 달 탐사를 시도하기로 했으나, 극악의 난이도인 프로젝트는 진전이 없었다.

결국 미국은 달에 간 것처럼 연출하기로 하고, 사람들이 믿을만큼 영상을 만들 능력자를 구했다.

하지만 한번도 가보지 않은 달과 우주를 연출하는 것도 쉽지 않은 노릇. 


그런데 1968년, 스탠리 큐브릭 감독 연출의 우주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가 미국에서 개봉되었다.

그리고 그 영화는 정말 우주선 내부에서 우주를 탐사하는 듯한 연출과 촬영을 선보여 수많은 사람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의 한 장면.


아직 유인 우주선도 발사하지 못한 상황에서 결국 미국 정부는

스탠리 큐브릭에게 달 착륙 연출을 부탁하기로 한다.

스탠리 큐브릭은 본인이 원하는 씬을 연출하기 위해 수십번에서 수백번의 재촬영도 마다하지 않는 완벽주의자.

이보다 더 완벽하게 달착륙을 연출할 적임자는 없었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69년, 스탠리 큐브릭이 요구한 완벽한 달 착륙 연출을 위해 아폴로 11호는 진짜 달에 가야했다.



P.S 스탠리 큐브릭은 6번의 재촬영을 요구하여 아폴로 우주선은 그 후에도 6번을 더 발사되었다.

화계 역사상 가장 미친놈들(?)로 유명했던 배우와 감독들

 




배우 클라우스 킨스키.


지금은 영화팬들이나 겨우 기억할 이름이 되었고, 아재들에겐 '나스타샤 킨스키'의 아버지라고 하면 '아!' 할겁니다 

독일 출신의 이 배우의 일생과 일화를 살펴보면 그냥 '광기'로는 부족하고 제목 그대로 '미친놈'이라는 수식어가 더 어울리는 수준입니다. 


1. 학생 시절 금고를 털거나 선생님을 폭행하고 도망감.

2. 2차대전에 징집되자 탈영하고 사형이 선고됨. 그리고 탈옥하다 총에 맞음. 

3. 50년대에 여성을 스토킹하고 교살하려다 경찰에 체포되어 반사회성 성격장애를 진단받고 정신병원에 입원함.

4. 영화 '아귀레, 신의 분노'를 찍을 때 단검으로 부하의 머리를 내리치는 장면에서 실제로 후려치는 바람에 철로 된 투구가 패이고 배우가 다침.

5. 그외에도 영화를 찍을 때마다 온갖 행패와 난리를 부리고, 감독이 연기를 지적하면 면전에서 거품을 물고 독설을 함.

6. 죽은 후에 친딸들을 성적으로 학대했다고 친딸들이 폭로함.





그리고 이 클라우스 킨스키와 작업을 했던 감독 또한 수많은 미친 일화를 많이 남긴걸로 유명합니다. 



독일의 영화감독 베르너 헤어조크입니다.

클라우스 킨스키의 광기를 감당함을 넘어 때론 그 클라우스 킨스키조차 찍소리 누를 정도의 광기를 보여준 일화들로 유명합니다. 

애초에 이 사람이 만든 작품들 중 클라우스 킨스키와 찍은 내용들이 주로 자연과 맞서는 인간의 광기를 소재로 합니다.

<아귀레, 신의 분노>-잉카 정복을 나선 피사로의 선발대에서 아귀레가 아마존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미쳐가는 과정을 그림

<위대한 피츠카랄도>-아마존 한가운데 오페라 하우스를 짓고 원주민에게 오페라를 보여주고 싶은 주인공이 증기선을 산으로 끌고 가는 과정을 그림.


이런 영화를 찍다보니 실제로 아마존강에 뗏목을 띄워서 배우들을 태우고 촬영하는 위험천만한 짓을 하거나

영화를 위해 진짜 스탭들이 배를 산으로 끌고 가야 했다거나

정글에서 벌목꾼이 독사에 물려서 다리를 절단당해 보상금을 왕창 줘야 했다던가 하는 온갖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이런 환경에서 클라우스 킨스키는 매일매일 난리와 짜증과 광기를 부렸는데

그 짜증과 광기를 베르너 헤어조크가 아무렇지도 않게 보고 있어서 현지 배우들이 더 무서워했다던가

현지 배우들이 더는 못견뎌 베르너 헤어조크 감독에게 저 사람 죽이면 안될까 물어보고

베르너 헤어조크는 '영화를 찍어야해서 지금은 안된다.'라고 대답했고

나중에 원주민 배우들을 말린 것을 후회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한번은 클라우스 킨스키가 영화에서 하차하겠다고 하자 헤어조크가 클라우스 킨스키에게

내 텐트에 총이 하나 있는데 당신이 떠나면 한발은 당신에게 쏠거고, 남은 한발은 내 머리에 쏠거라고 대답하자

그 클라우스 킨스키가 쫄아서 연기를 계속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베르너 헤어조크도 결국 클라우스 킨스키의 성질머리에 화가 나서 그의 집을 불태우려고 기름을 들고 찾아갔지만

그 집 개가 무서워서 그냥 포기했다는 더 말도 안되는 일화도 있구요. 




이 두 배우와 감독 일화를 보니 영화계에서 특이하거나 이상하다는 감독들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효과가 있더라구요. 

조선 후기 예송 논쟁에 숨어있는 매우 민감한 정치적 배경.txt

 학교에서 한국사 교과서에서 예송논쟁은 한번은 언급되기 때문에 대충은 들어봤을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대충 배운 내용은 '효종이 죽자 계모인 자의대비가 상복을 얼마나 입어야하는가(1차 예송),

15년 후 효종의 부인인 인선왕후가 죽자 시어머니인 자의대비가 상복을 얼마나 입어야하는가(2차 예송) 로 

온 나라의 사대부들이 논쟁을 했다' 정도라서 이 문제가 왜 당시에 그렇게 불타옸랐는지에 대해선 잘 모르죠.

그런데 자칫 이 쓸데없는 상복 논쟁 속에는 사실 16~17세기 조선왕조사가 다 관통되어있다고 봐야합니다. 



왕조 국가이든, 현대 민주주의 국가든 가장 중요한 건 권력을 쥐는 사람들의 정통성에 대한 것입니다.

현대 민주주의 국가는 선거를 통해 국민에게 가장 많은 선택을 받은 사람이 권력을 잡게 되어있고, 그래서 공정한 선거가 굉장히 중요하죠. 

그래서 부정선거를 통해 집권하거나, 선거 없이 무력으로 권력을 찬탈하는 쿠데타를 가장 경계하죠.

왕조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건 왕위계승권이라고 할 수 있고, 이 왕위계승권은 법으로 정해져있죠.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조선왕조는 유교 예법이 곧 국법이고, 왕위계승 역시 유교 예법에 따릅니다.

조선은 왕위계승에 대해선 확실히 정해놓지는 않았지만, 이 당시 제사를 상속할 때 유교 예법에서 순위를 보면

1순위 적장자 및 적장손

2순위 중자 및 적장손

3순위 적장자의 첩들의 자손

4순위 형제 로 되어있습니다. 

유교 사회에서 제사를 상속한다는 건 종가를 계승한다는 문제와 연결되어있죠.

현대 사회에서도 상속 문제로 콩가루 집안 되는 사례가 수두룩하다는 걸 생각하면 이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지 감이 오실 겁니다.

쉽게 말해 조선왕조는 '적장자 계승'을 우선으로 했습니다. (정작 실제 적장자가 잇는 경우는 별로 없었지만)

문제는 이런 적장자 계승 원칙이 선조 이후 효종까지 왕들이 다 논란을 겪을 정도로 흔들렸다는 점입니다. 



1. 선조의 정통성 문제

명종 사후 왕위를 이은 선조는 적장자는 커녕 방계 왕족이었습니다. 

정확히는 명종의 아버지 중종의 서자7남 덕흥군의 3번째 아들이었습니다.

물론 계승 당시에는 중종의 서자1남 복성군의 (중종의 적자 2명이 인종, 명종) 양자로 있었기에 명종 사후 계승서열 1위였고

후에 다시 명종의 양자로 족보를 갈아버려서 정통성 문제를 차단하려 했습니다. 

조선시대에서는 혈연보다 종가를 누구에게 이어주느냐가 중요해서 양자로 들어가는 걸로 이런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이 가능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조는 정통성 문제로 고생을 했습니다.


2. 광해군의 정통성 문제

근데 이 선조가 임진왜란 때 세자로 삼은 광해군 역시 적장자가 아니였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광해군은 후궁 공빈 김씨의 두번째 아들로, 서자1남인 임해군보다도 계승서열이 낮았으나

임해군이 워낙에 성품이 개차반이라 제외되었고, 임진왜란이란 국가적 위기 속에 광해군이 세자가 되었습니다.

하여튼 광해군 본인도 그렇게 탄탄한 입지가 아니었고,  후에 선조가 나이를 먹고 적자인 영창대군을 낳아버리면서

이것이 후에 광해군 시기 온갖 논란의 원인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흔들리는 자신의 정통성에 대한 집착으로 인한 무리수가(온갖 역모 사건, 영창대군 사사, 인목대비 폐비 등) 광해군의 몰락의 중요한 원인이 되죠.


3. 인조의 정통성 문제

그리고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즉위한 인조는 이 문제에서 오히려 한술 더 떠서 족보를 더 꼬아놨습니다.

일단 인조의 아버지가 선조의 서자5남 정원군인데, 선조의 서자 3,4남이 일찍 죽어서 서자2남이었던 광해군 다음 순위였고

위에 언급했듯이 선조의 양자로 들어가는 걸로 어느 정도 해결이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이 와중에 자기 아버지 정원군을 왕으로 추숭하면서 정통성을 또 무너뜨리죠.

이 문제는 당시 인조반정의 주역들까지 거의 대부분 반대할 정도로 인조의 무리수였는데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이 광해군 다음 순서의 왕실 어른이었지만, 문제는 한번도 세자였던 적이 없었습니다. 

이 세자란 명칭이 중요한게, 세자는 사실상 다음 왕이기 때문에, 다른 왕의 아들들(즉 세자의 형제들)과 군신관계 정도로 차이가 납니다. 

그래서 세자였던 적도 없는 사람을 억지로 왕으로 추승하려니 다들 반대한건데, 인조는 이걸 무리하게 밀어붙입니다.

선조의 양자로 왕위를 이었지만, 진짜 아버지 정원군도 왕으로 만들어버리는 개족보를 만든 셈이죠.


4. 효종의 정통성 문제

인조에게는 장남 소현세자와 차남 봉림대군이 있었으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모두 병자호란의 패배로 인해

청으로 끌려가서 9년동안이나 인질로 잡히게 되고, 청은 이 둘을 구실로 조선와 인조를 두고두고 협박하는데 써먹습니다.

붙잡혀간 소현세자는 청에서 농장을 만들어 포로로 잡힌 조선인들을 구해 일하게 한 후 장사를 하고, 그 돈으로 다시 청의 인맥을 쌓는 행보를 보여줍니다.

문제는 인조 입장에선 청나라에서 독자 행보를 보이며 자기 입지를 쌓는 세자가 여러모로 불편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게 단순히 부자 관계가 아니라 왕조 국가에서 왕과 차기 왕의 권력 구도에서 생각하면

청나라의 입김을 등에 업은 세자가 조선 왕으로 즉위할 수 있는 그림이 되거든요.

거기에 고려의 원 간섭기에 고려 왕들이 원나라 입김에 따라 즉위했다 마음대로 갈아치워졌던 전례가 엄연히 있었기에 

청나라의 입김이 커진 임금이 즉위하는 건  조선의 입장에서 경계할 일이었습니다. 

결국 인조와 소현세자의 관계는 멀어질 수 밖에 없었고, 인조는 노골적으로 세자를 견제합니다. 

그리고 9년만에 조선 귀국길에 나선 소현세자가 귀국길부터 앓았던 병 때문에 귀국 3개월도 안되어 급사하게 되자

인조는 소현세자에게 세명의 자식이 있었음에도 소현세자의 동생 봉림대군(후에 효종)을 세자로 책봉합니다.

하지만 이 과정은 '적장자 다음 순서는 손자'로 순서를 정한 예법을 어긴 것이기 때문에 두고두고 문제가 될 수 밖에 없었고

실제로 당시에도 '예법에 따라 소현세자의 아들이 왕위를 이어야한다.'는 분위기가 있었던 걸로 보입니다. 

결국 효종의 세자 정통성은 흔들릴 수 밖에 없었고, 인조는 이걸 해결하기 위해 

소현세자빈 강씨를 거의 역적 혐의를 뒤집어 씌워 죽여버리면서 '역적의 자식에게 적통이 돌아갈 수 없다'란 명분을 만들고

강씨 집안을 풍박박산 내버린 후 소현세자의 남은 세 아들조차 귀양보내버립니다. 


5. 현종의 정통성 문제

현종은 효종의 적장자로 왕위를 이었기 때문에 본인의 정통성은 문제가 없습니다만 위에 언급한 아버지인 효종의 정통성이 문제였습니다. 

거기에 귀양갔던 소현세자의 아들 경안군이 살아있었기에 이것 또한 두고두고 논란거리였죠.

이런 상황에서 효종이 죽고 상복을 입어야할 대상은 인조의 부인이자 효종의 어머니인 자의대비였는데(물론 인조가 늦게 결혼해서 자의대비가 효종보다 더 어렸지만)

적장자가 아니지만 왕위를 이은 효종의 위치가 골치 아파진 셈이죠.

문제는 여기서 서인 송시열이 '아들이긴 하지만 적장자가 아니므로 1년을 입자'라는 폭탄을 터뜨립니다.

이건 효종의 정통성 문제+아직까지 살아있던 소현세자의 아들 경안군의 존재와 직결되기 때문에 자칫

'효종은 적장자가 아님=왕위계승이 적절하지 않음=소현세자의 아들이 적통=그러면 현종 너는 뭐지?' 란 말그대로 왕가를 뒤흔드는 폭탄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서인이 송시열의 주장을 잘 돌려서 주장해서(조선 예법에는 적장자 구별없이 아들은 1년이라고 되어있으니 1년으로 하자고 주장) 1차 예송에선 승리하지만

2차 예송에서 송시열이 또 '맏며느리는 1년이지만 효종의 부인은 맏며느리가 아니므로 9개월'이라 주장하는 바람에 또 이 문제가 꼬이고

서인은 이 주장을 수습하기 위해 '중국 법에 9개월이라 되어있으니 9개월로 하자'라고 정리합니다. 

그러나 현종이 서인의 주장의 모순을 공격하며(예전에는 적장자 구별 없던 조선 예법을 따르더니 왜 지금은 중국 예법을 가져오냐? 1차 때랑 똑같이 1년으로 하자.)

서인의 주역들을 날려버리면서 서인의 권력이 줄어듭니다. 



결론.

표면적으로는 단순히 상복을 입는 기간으로 싸운 것으로 보이는 예송논쟁은 

조선 왕조 입장에서는 선조 때부터 끊임없이 이어진 왕의 정통성 논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왕조의 정통성과 계승권 시비 논쟁은 폭탄과도 같은 주제죠.

여기에 예송논쟁에 참여한 서인과 남인의 성리학적 배경까지 설명하면 너무 복잡한거 같아서 그건 나중에 따로 쓰겠습니다. 

확실한건 역사에서 현대인의 관점에선 왜 저런 걸로 싸웠냐 하는 것들도

당시의 관점에서는 매우 중요한 논란이었다는 것이죠. 

곡선을 사랑한 건축가, 직선을 사랑한 건축가

 근현대 건축가 중에 가장 예술적인 건축으로 유명한 인물은 안토니 가우디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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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바르셀로나를 상징하는 건축가이자, 세계적으로도 가장 많이 알려진 인물이죠.

그가 남긴 건축물은 현재도 바르셀로나의 관광책자를 풍부하게 만들어주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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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유명한 건축물 중 하나인 '까사 밀라'입니다. 

그는 건축에서 곡선을 중시하였으며, 그의 건축에서 곡선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가우디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자, 스페인에서도 지역색 강한 카탈루니아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의 건축에서 종교적 의미와 카탈루니아의 상징과 전설을 절묘하게 녹여 넣었습니다.

또한 가우디는 예술성만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채광과 환기, 건축물의 하중 분산도 고려해 정교하게 설계하는 등 건축의 기능성도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가 설계한 구엘공원의 의자들은 수많은 사람들의 엉덩이와 허리라인 각도를 직접 측정하고 맞춰 인체공학적으로 곡선으로 되어있고

심지어 집안의 가구들까지 인체공학적으로 맞춤형 설계를 했는데 그 가운데서도 곡선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때문인지 가우디의 건축물은 그의 평생 후원자였던 구엘을 비롯하여 부유층을 위한 특별한 건물들이 많았죠.

그래서 가우디 건축물 하나 하나는 예술이자 현대에선 새로운 신화가 되었습니다. 



가우디가 수많은 건축물들을 남긴 후, 마지막으로 평생이자 최후의 미완성 역작인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건축에 삶을 불태우는 1910년대 이후

유럽 한편에서는 르 코르뷔지에를 비롯한 건축가들 역시 새로운 건축사조를 만들어냅니다. 모더니즘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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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르 코르뷔지에가 만들어낸 '도미노 이론'은 현대 건축의 기본틀로 사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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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코르뷔지에의 '도미노 이론'입니다. 

지붕과 측면의 벽돌을 없애고, 기둥으로 하중을 받치면서 층과 층 사이는 계단으로 이동하고, 건축물 내부는 자유롭게 공간을 구성한다. 

지금에야 새로울 것이 없죠. 왜냐하면 현대 건축물의 기본적인 공식이니까요.

하지만 이런 건축물들이 생긴 것은 인류 사회에서 100년이 되지 않았습니다. 모더니즘을 통해 비로소 완성되었죠.

모더니즘 건축에서 집은 기능성과 실용성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모더니즘 건축은 1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 피해의 재건이란 시대적 배경과 맞닿아있기 때문이었죠.

산업 사회에 맞춰 공장에서 제조된 규격화된 재료를 사용하면 이전보다 훨씬 간단하고 저렴하고 빠르게 사람들이 살 건물들을 만들 수 있게 되죠.

디자인 또한 화려함에서 벗어나 실용성과 기능성을 추구하며 단순한 형태와 물질 그대로의 특징을 추구하려고 합니다.

이런 시대에 맞춰 모더니즘 시대의 건축, 디자인은 직선을 기본으로 합니다. 




곡선을 사랑한 가우디는 그만이 만들 수 있는 독특하고도 예술적인 건축물들로 새로운 신화를 만들었고

직선을 사랑한 모더니즘 건축은 현대에 이르러서 건축과 디자인이 일부 부유층의 산물이 아닌 모든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것으로 바꿨습니다. 

그리고 가우디가 남긴 말은 마치 이 모든 것들을 예견한 듯 날카롭고도 명확합니다.


"곡선은 신의 영역이며, 직선은 인간의 영역이다."

일본 근대사 이 동네만 알아도 대충 파악 가능하다 2편 - 아이즈 번

 1868년 3월, 메이지 신정부와 전쟁을 했던 막부의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에도(도쿄)에서의 결전을 포기하고 항복을 합니다.

그런데 전황이 불리했지만 여전히 막부파도 건재한 상황이었고, 특히 도쿠가와 막부의 근거지인 에도와 일본 동북부 지역은 여전히 막부를 지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래나 저래나 일본은 무사의 나라였기 때문에, 싸우기도 전에 항복을 한 쇼군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겼고

항복에 반대한 막부파들은 계속 에도 근방에 집결하여 전투를 이어나가고 있었습니다.

특히 이미 근대화된 전력을 갖춘 막부 해군은 신정부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안전 보장을 요구하며 계속 에도만에서 위협을 가하고 있었는데

신정부의 해군 전력으로는 이들을 이길 수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이 해군은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안전을 보장받자 8월에 에도를 떠나 북쪽 홋카이도로 갑니다.


신정부 역시 얼른 내전을 끝내고 자신들의 힘이 막부파보다 세다는걸 과시해야 했기 때문에

에도 외곽지역에서 저항을 계속하는 막부파들을 공격했고 승리합니다. 

1868년 5월이 지나자 막부파들은 일본 동북부 지역으로 후퇴하기 시작했고, 신정부 역시 추격을 개시합니다.

이미 쇼군도 항복했고, 흉작으로 경제적 문제를 겪은 동북부 지역의 번들은 전쟁을 끝내기 위해 타협을 제시하는데

막부의 편에 섰다가 역적이 된 쇼나이 번(현재 야마가타 현 북부)과 아이즈 번(현재 후쿠시마 현 서부)에 대한 관대한 처분을 요청합니다. 

하지만 신정부와의 협상이 결렬되면서 동북부 지역 번들은 동맹을 맺고(오우에츠열번동맹) 신정부와 전쟁을 하게 됩니다.


이 막부파 번의 중심 세력 중 하나인 아이즈 번은 철저한 막부파였는데, 영주인 마츠다이라 가문 부터가 도쿠가와 가문과 관련이 있습니다.

원래 도쿠가와 가문은 마츠다이라 성씨를 쓰고 있다가 개명을 했던 것이고, 막부를 성립한 후에도 가주와 후계자만 도쿠가와 성씨를 썼습니다. 

그외의 차남들이나 방계 가문, 또는 강력해서 명예를 세워줄 필요가 있었던 가문들이 마츠다이라 성씨를 쓸 수 있었습니다. 

아이즈 번의 마츠다이라 가문도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자손들(정확히는 사생아)입니다. 


9대 영주인 마츠다이라 카타모리는 막부 말기인 1862년 교토를 수호하는 교토 수호직에 임명되어 5년간 교토의 치안을 책임지며 막부파로 활동했고

교토에서 정치적 테러를 일삼던 양이 지사들을 상대하기 위한 무력 집단으로 신선조(신센구미)를 만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전에 조슈 번이 교토의 궁을 쳐서 정권을 장악하려 했을 때 앞장서서 진압하기도 합니다. 

보신전쟁이 시작되자 교토에서의 첫 전투에 참여했으나 패배하여 아이즈 번으로 후퇴하죠.

신정부의 주축인 조슈 번 인사들은 이전에 교토에서 막부파로 활동하며 자신들을 공격했던 아이즈 번에 이를 갈고 있었었습니다.


신정부의 병력들이 동북부까지 밀려오자 결국 후퇴하는 막부파, 동북지역의 번들과 연합하여 신정부와 맞서기로 하지만

애초에 전투보다 아이즈 번을 구명하기 위해 뭉쳤던 동북지역의 번들은 신정부의 공격에 하나둘씩 박살나기 시작하자 와해되기 시작합니다. 

또한 아이즈 번은 5년간 교토 수호직으로 활동하면서 막대한 돈을 써야했기 때문에 번의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아 군의 상태도 좋지 않았고

따라서 계속 패배하다가  아이즈 번의 중심지인 와카마츠 성까지 밀리게 되고, 일부 여성들이 직접 무장을 하고 싸웠을 정도로 저항했으나 전황은 뒤집어지지 않습니다.

결국 1달간의 포위전 끝에 1868년 11월에 아이즈 번은 항복하게 됩니다.


신정부는 이 아이즈 번의 '반란군'들을 매우 가혹하게 처분합니다. 

아이즈 번에서는 약 3천명이 전쟁 중에 사망하고, 관군은 아이즈 번 지역에서 약탈, 강간을 일삼았다고 합니다.

또한 와카마츠 성이 함락될 때 아이즈 번의 가신들과 무사 가족들 수백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아이즈 번의 무사들 등 1만 7천여명이 일본 혼슈 섬 북부 끝의 황무지로 강제로 쫓겨나게 됩니다. 

개발도 제대로 되지 않은 척박한 땅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겨우 연명하거나 굶어죽다가 겨우 귀환합니다. 

그리고 아이즈 번에 남은 사람들도 모두 평민으로 신분이 강등됩니다. 


이후로도 정부에 맞섰던 동북 지역들은 차별을 받는데, 동북 지역을 관리하는 고위직들을 메이지 유신의 주축이었던 사쓰마, 조슈 츨신들이 맡았고,

관료나 군에서도 사쓰마, 조슈가 독점하던 분위기에서 동북 지역 출신들은 차별을 받아 출세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분위기는 현대에도 이어져 120년이 지난 1986년 구 조슈 번 지역인 야마구치현 하기 시에서 아이즈와카마츠 시에 화해와 우호 관계를 제안했지만 

아이즈와카마츠 시에서는 아직은 화해할 시기가 아니라는 이유로 시민들이 반대하며 거절합니다. 

또한 2018년 일본에서 '메이지유신 150주년'을 크게 기념할 때

구 아이즈 번 지역은 '보신전쟁 150주년'을 강조하면서 아직도 메이지유신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메이지 유신은 사쓰마, 조슈, 토사, 사가 번, 특히 사쓰마와 조슈 번이 중심이 되어 막부를 무너뜨리고 신정부를 만들었고

이후에도 사쓰마와 조슈 출신들이 메이지 신정부의 요직들을 차지하면서 사실상 이 두 번의 파벌들을 중심으로 정치가 이뤄집니다. 

그런데, 이후 1873년 그 유명한 '정한론(한국을 정벌하자는 주장)' 논쟁으로 사쓰마 파벌의 주축 중 하나이자 보신전쟁의 지휘관이었던 사이고 다카모리가 권력에서 밀려나

고향으로 낙향하여 1877년 반란을 일으키지만 (세이난전쟁) 패배합니다.

이 때 징병제를 실시한지 얼마 안되어 군대가 부족했던 일본 정부에서 약 9500명의 무사 출신들을 전쟁에 동원하는데

이 중 절반이 옛 동북 지방 출신들이었고 이들은 10년전 자신의 고향을 짓밟았던 사쓰마에게 이를 갈고 있었기에 전장터에서 앞장서며 피의 복수를 합니다. 



다음에는 사쓰마 번이 왜 메이지 유신이 주축이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