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6월 24일 금요일

곡선을 사랑한 건축가, 직선을 사랑한 건축가

 근현대 건축가 중에 가장 예술적인 건축으로 유명한 인물은 안토니 가우디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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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바르셀로나를 상징하는 건축가이자, 세계적으로도 가장 많이 알려진 인물이죠.

그가 남긴 건축물은 현재도 바르셀로나의 관광책자를 풍부하게 만들어주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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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유명한 건축물 중 하나인 '까사 밀라'입니다. 

그는 건축에서 곡선을 중시하였으며, 그의 건축에서 곡선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가우디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자, 스페인에서도 지역색 강한 카탈루니아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의 건축에서 종교적 의미와 카탈루니아의 상징과 전설을 절묘하게 녹여 넣었습니다.

또한 가우디는 예술성만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채광과 환기, 건축물의 하중 분산도 고려해 정교하게 설계하는 등 건축의 기능성도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가 설계한 구엘공원의 의자들은 수많은 사람들의 엉덩이와 허리라인 각도를 직접 측정하고 맞춰 인체공학적으로 곡선으로 되어있고

심지어 집안의 가구들까지 인체공학적으로 맞춤형 설계를 했는데 그 가운데서도 곡선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때문인지 가우디의 건축물은 그의 평생 후원자였던 구엘을 비롯하여 부유층을 위한 특별한 건물들이 많았죠.

그래서 가우디 건축물 하나 하나는 예술이자 현대에선 새로운 신화가 되었습니다. 



가우디가 수많은 건축물들을 남긴 후, 마지막으로 평생이자 최후의 미완성 역작인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건축에 삶을 불태우는 1910년대 이후

유럽 한편에서는 르 코르뷔지에를 비롯한 건축가들 역시 새로운 건축사조를 만들어냅니다. 모더니즘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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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르 코르뷔지에가 만들어낸 '도미노 이론'은 현대 건축의 기본틀로 사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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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코르뷔지에의 '도미노 이론'입니다. 

지붕과 측면의 벽돌을 없애고, 기둥으로 하중을 받치면서 층과 층 사이는 계단으로 이동하고, 건축물 내부는 자유롭게 공간을 구성한다. 

지금에야 새로울 것이 없죠. 왜냐하면 현대 건축물의 기본적인 공식이니까요.

하지만 이런 건축물들이 생긴 것은 인류 사회에서 100년이 되지 않았습니다. 모더니즘을 통해 비로소 완성되었죠.

모더니즘 건축에서 집은 기능성과 실용성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모더니즘 건축은 1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 피해의 재건이란 시대적 배경과 맞닿아있기 때문이었죠.

산업 사회에 맞춰 공장에서 제조된 규격화된 재료를 사용하면 이전보다 훨씬 간단하고 저렴하고 빠르게 사람들이 살 건물들을 만들 수 있게 되죠.

디자인 또한 화려함에서 벗어나 실용성과 기능성을 추구하며 단순한 형태와 물질 그대로의 특징을 추구하려고 합니다.

이런 시대에 맞춰 모더니즘 시대의 건축, 디자인은 직선을 기본으로 합니다. 




곡선을 사랑한 가우디는 그만이 만들 수 있는 독특하고도 예술적인 건축물들로 새로운 신화를 만들었고

직선을 사랑한 모더니즘 건축은 현대에 이르러서 건축과 디자인이 일부 부유층의 산물이 아닌 모든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것으로 바꿨습니다. 

그리고 가우디가 남긴 말은 마치 이 모든 것들을 예견한 듯 날카롭고도 명확합니다.


"곡선은 신의 영역이며, 직선은 인간의 영역이다."

일본 근대사 이 동네만 알아도 대충 파악 가능하다 2편 - 아이즈 번

 1868년 3월, 메이지 신정부와 전쟁을 했던 막부의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에도(도쿄)에서의 결전을 포기하고 항복을 합니다.

그런데 전황이 불리했지만 여전히 막부파도 건재한 상황이었고, 특히 도쿠가와 막부의 근거지인 에도와 일본 동북부 지역은 여전히 막부를 지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래나 저래나 일본은 무사의 나라였기 때문에, 싸우기도 전에 항복을 한 쇼군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겼고

항복에 반대한 막부파들은 계속 에도 근방에 집결하여 전투를 이어나가고 있었습니다.

특히 이미 근대화된 전력을 갖춘 막부 해군은 신정부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안전 보장을 요구하며 계속 에도만에서 위협을 가하고 있었는데

신정부의 해군 전력으로는 이들을 이길 수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이 해군은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안전을 보장받자 8월에 에도를 떠나 북쪽 홋카이도로 갑니다.


신정부 역시 얼른 내전을 끝내고 자신들의 힘이 막부파보다 세다는걸 과시해야 했기 때문에

에도 외곽지역에서 저항을 계속하는 막부파들을 공격했고 승리합니다. 

1868년 5월이 지나자 막부파들은 일본 동북부 지역으로 후퇴하기 시작했고, 신정부 역시 추격을 개시합니다.

이미 쇼군도 항복했고, 흉작으로 경제적 문제를 겪은 동북부 지역의 번들은 전쟁을 끝내기 위해 타협을 제시하는데

막부의 편에 섰다가 역적이 된 쇼나이 번(현재 야마가타 현 북부)과 아이즈 번(현재 후쿠시마 현 서부)에 대한 관대한 처분을 요청합니다. 

하지만 신정부와의 협상이 결렬되면서 동북부 지역 번들은 동맹을 맺고(오우에츠열번동맹) 신정부와 전쟁을 하게 됩니다.


이 막부파 번의 중심 세력 중 하나인 아이즈 번은 철저한 막부파였는데, 영주인 마츠다이라 가문 부터가 도쿠가와 가문과 관련이 있습니다.

원래 도쿠가와 가문은 마츠다이라 성씨를 쓰고 있다가 개명을 했던 것이고, 막부를 성립한 후에도 가주와 후계자만 도쿠가와 성씨를 썼습니다. 

그외의 차남들이나 방계 가문, 또는 강력해서 명예를 세워줄 필요가 있었던 가문들이 마츠다이라 성씨를 쓸 수 있었습니다. 

아이즈 번의 마츠다이라 가문도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자손들(정확히는 사생아)입니다. 


9대 영주인 마츠다이라 카타모리는 막부 말기인 1862년 교토를 수호하는 교토 수호직에 임명되어 5년간 교토의 치안을 책임지며 막부파로 활동했고

교토에서 정치적 테러를 일삼던 양이 지사들을 상대하기 위한 무력 집단으로 신선조(신센구미)를 만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전에 조슈 번이 교토의 궁을 쳐서 정권을 장악하려 했을 때 앞장서서 진압하기도 합니다. 

보신전쟁이 시작되자 교토에서의 첫 전투에 참여했으나 패배하여 아이즈 번으로 후퇴하죠.

신정부의 주축인 조슈 번 인사들은 이전에 교토에서 막부파로 활동하며 자신들을 공격했던 아이즈 번에 이를 갈고 있었었습니다.


신정부의 병력들이 동북부까지 밀려오자 결국 후퇴하는 막부파, 동북지역의 번들과 연합하여 신정부와 맞서기로 하지만

애초에 전투보다 아이즈 번을 구명하기 위해 뭉쳤던 동북지역의 번들은 신정부의 공격에 하나둘씩 박살나기 시작하자 와해되기 시작합니다. 

또한 아이즈 번은 5년간 교토 수호직으로 활동하면서 막대한 돈을 써야했기 때문에 번의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아 군의 상태도 좋지 않았고

따라서 계속 패배하다가  아이즈 번의 중심지인 와카마츠 성까지 밀리게 되고, 일부 여성들이 직접 무장을 하고 싸웠을 정도로 저항했으나 전황은 뒤집어지지 않습니다.

결국 1달간의 포위전 끝에 1868년 11월에 아이즈 번은 항복하게 됩니다.


신정부는 이 아이즈 번의 '반란군'들을 매우 가혹하게 처분합니다. 

아이즈 번에서는 약 3천명이 전쟁 중에 사망하고, 관군은 아이즈 번 지역에서 약탈, 강간을 일삼았다고 합니다.

또한 와카마츠 성이 함락될 때 아이즈 번의 가신들과 무사 가족들 수백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아이즈 번의 무사들 등 1만 7천여명이 일본 혼슈 섬 북부 끝의 황무지로 강제로 쫓겨나게 됩니다. 

개발도 제대로 되지 않은 척박한 땅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겨우 연명하거나 굶어죽다가 겨우 귀환합니다. 

그리고 아이즈 번에 남은 사람들도 모두 평민으로 신분이 강등됩니다. 


이후로도 정부에 맞섰던 동북 지역들은 차별을 받는데, 동북 지역을 관리하는 고위직들을 메이지 유신의 주축이었던 사쓰마, 조슈 츨신들이 맡았고,

관료나 군에서도 사쓰마, 조슈가 독점하던 분위기에서 동북 지역 출신들은 차별을 받아 출세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분위기는 현대에도 이어져 120년이 지난 1986년 구 조슈 번 지역인 야마구치현 하기 시에서 아이즈와카마츠 시에 화해와 우호 관계를 제안했지만 

아이즈와카마츠 시에서는 아직은 화해할 시기가 아니라는 이유로 시민들이 반대하며 거절합니다. 

또한 2018년 일본에서 '메이지유신 150주년'을 크게 기념할 때

구 아이즈 번 지역은 '보신전쟁 150주년'을 강조하면서 아직도 메이지유신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메이지 유신은 사쓰마, 조슈, 토사, 사가 번, 특히 사쓰마와 조슈 번이 중심이 되어 막부를 무너뜨리고 신정부를 만들었고

이후에도 사쓰마와 조슈 출신들이 메이지 신정부의 요직들을 차지하면서 사실상 이 두 번의 파벌들을 중심으로 정치가 이뤄집니다. 

그런데, 이후 1873년 그 유명한 '정한론(한국을 정벌하자는 주장)' 논쟁으로 사쓰마 파벌의 주축 중 하나이자 보신전쟁의 지휘관이었던 사이고 다카모리가 권력에서 밀려나

고향으로 낙향하여 1877년 반란을 일으키지만 (세이난전쟁) 패배합니다.

이 때 징병제를 실시한지 얼마 안되어 군대가 부족했던 일본 정부에서 약 9500명의 무사 출신들을 전쟁에 동원하는데

이 중 절반이 옛 동북 지방 출신들이었고 이들은 10년전 자신의 고향을 짓밟았던 사쓰마에게 이를 갈고 있었기에 전장터에서 앞장서며 피의 복수를 합니다. 



다음에는 사쓰마 번이 왜 메이지 유신이 주축이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일본 근대사 이 동네만 알아도 대충 파악 가능하다 1편 - 교토 (2)

 


새롭게 막부의 쇼군이 된 도쿠가와 요시노부에게 놓인 상황은 비관적이었고, 심지어 요시노부 역시 막부 체제엔 큰 애정이 없었습니다.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쇼군가에서 어릴 때부터 쇼군 후계자 중 하나로 지목받을만큼 똑똑한 인물이었지만 동시에 기반이 취약했죠.

요시노부는 미토 번(현재 이바라키현) 출신으로 도쿠가와 가문의 방계 출신에 어머니는 왕족 방계 출신이었습니다. 

미토 번의 도쿠가와 가문은 방계에서도 여러모로 급이 낮았고 또한 막부에 위협이 된 존왕양이 사상의 기반이 탄생한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요시노부는 교토에서 막부와 왕족간의 연계를 주장하는 '공무합체'파로 활동하여 조정과 덴노의 지지를 얻기도 했고

그와중에 반막부파를 꾸준히 견제해야하는 어려운 행보를 보입니다. 

물론 정치력이 뛰어난 요시노부는 교토 정치계에서 본인의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동시에 반막부파도 꾸준히 견제하는데 성공하지만

이래저래 복잡한 그의 행보 탓에 오히려 막부 내에서 요시노부를 불신하는 사람들도 늘어갑니다. 

그래서 쇼군이 될 당시에 막부 내부에선 요시노부가 쇼군이 되는 걸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출신지인 미토 번 역시 이전에 미토 번 존왕양이파들을 버렸던 요시노부의 행적 때문에 그를 지지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쇼군이 된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개항에 반대하던 고메이 덴노도 죽자 적극적으로 개항 노선에 나서는데 

반란을 일으킨 조슈에 관대한 처분을 내리고, 외국 공사들을 오사카에서 접견하고, 그간 계속 외교적인 문제였던 효고항(현재 효고현) 개항을 밀어붙여버립니다.

이는 사쓰마 번이 조슈 정벌에 대한 관대한 처분을 요구하면서 막부 책임론을 앞세우고, 효고항 개항을 문제 삼아 막부의 외교권을 조정에 빼앗으려는 계책을 눈치채고

한발 앞서서 사쓰마 번의 문제 제기를 봉쇄해버리면서 정국의 주도권을 본인이 끌고 가려는 계산이었죠.

결국 사쓰마 번은 아무 것도 못하고 요시노부의 계책에 말려버리는데, 이는 요시노부가 그간 사쓰마를 비롯한 반대파를 상대로 쓰던 방법이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막부 군사들에게 근대적 장비와 훈련을 제공하고, 막부를 근대적 행정체계로 개편하는 등의 근대화 개혁에 들어갑니다. 

하지만 구 체제를 유지하면서 하는 개혁이 늘 그렇듯이 속도는 지지부진했고, 막부 내부에서도 독단적인 요시노부의 결정에 의심과 불신이 커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요시노부의 측근들이 암살되며 그는 고립되어갑니다. 


그 가운데, 반막부파는 다시 한번 정치적 승부수를 던지는데 막부가 가진 실권을 조정에 반납하라는 요구를 합니다. 

막부는 당연히 거절할 것이고, 이것을 구실로 삼아 막부를 무력으로 공격할 속셈이었습니다. 

하지만 요시노부는 이 요구를 바로 받아들이고 조정에 막부의 권한을 반납해버립니다. 이것을 '대정봉환'이라 합니다. 

요시노부의 노림수는 이렇게 요구 사항을 바로 수락하여 반막부파의 명분을 없애는 동시에

이미 수백년간 실권이 없던 조정이 갑자기 권한을 받아봐야 제대로 나라를 운영할 수 없을 것이기에 결국 실권은 계속 자신이 쥘 수 있다는 것이었고

요시노부의 계산대로 조정은 일상적인 업무는 이전처럼 하라고 선언했고, 이에 따라 요시노부는 여전히 실권을 쥐는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요시노부 본인을 중심으로 새로운 정부를 구상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또 다시 요시노부에게 당한 반막부파는 더이상 기다리지 않고, 1867년 12월 9일에 쿠데타를 통해 왕궁을 장악합니다.

그리고 막부와 기존 정치 체제를 폐지하고 신정부 수립을 선포하죠.

오사카에 있던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쿠데타의 징후를 알고도 그냥 냅두었다고 합니다. 

위에 말했듯 존왕양이 사상의 기반이었던 미토 번 출신이어서 막부 가문임에도 막부 체제보단 왕정복고를 더 선호했다고 합니다. 

신정부는 정권을 잡자마자 도쿠가와 가문에 대한 처분 문제와 재정 문제로 내분을 겪기 시작했고,

정예병과 인재는 부족했지만, 재정이나 외교적으론 우위에 있었던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무력 대결을 피하며 신정부가 자멸하기를 기다립니다. 


문제는 그동안 꾸준히 요시노부를 의심했던 막부의 강경파들이 계속 무력 대결을 주장해왔고

신정부 역시 무력 대결밖에 방법이 없었기에 막부의 근거지인 에도에 사쓰마 낭인들을 파견해 살인, 강도 등 테러를 일삼으며 도발합니다.

이에 넘어간 막부 과격파가 에도의 사쓰마 번 저택을 불질러버리고

막부의 전쟁 불사 분위기를 도저히 누를 수가 없었던 요시노부는 친막부파 번들에 동원령을 내리면서 결국 그렇게 피하려고 했던 전쟁으로 휘말립니다. 

이것을 보신전쟁이라 부릅니다. 


해가 바뀐 1868년 1월 3일, 15000명의 막부군이 교토로 공격을 개시했고, 신정부의 수비군은 수천명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막부군의 지휘관들이 무능한 지휘로 도리어 전투에서 패배하고 맙니다. 

그리고 1월 5일, 신정부는 관군으로 인정받는 깃발을 받으며 동시에 막부군이 반란군이 되어버리자 막부군은 무너지기 시작했고,

애초에 전쟁을 할 생각이 없었던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오사카에서 배를 타고 에도로 떠나버립니다. 

막부의 패배와 쇼군의 후퇴 소식에 간을 보던 일본 서부의 다이묘들이 신정부의 편에 서기 시작하면서 전황은 막부에 불리해집니다. 


기선제압을 한 신정부군은 막부의 근거지인 에도로 향합니다.

문제는 신정부군이라 해봐야 사쓰마, 조슈, 토사, 사가 4개 번의 병사들이 주축인 소수였기에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여전히 건재했던 친막부파를 결집시키고, 근대화된 함대를 가진 막부 해군과 함께 에도에서 싸움에 나선다면 여전히 승패를 장담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애초에 전쟁에 소극적인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반란군이 되어버리자 싸움을 지속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1868년 3월 15일, 요시노부는 에도성에서의 항전을 포기하고 항복을 선택합니다.

항복의 댓가로 요시노부 본인과 도쿠가와 가문과 막부 인사들의 안전을 보장받았으며, 이후 공작 작위를 받고 76세까지 풍족하게 살다 사망합니다.


그렇지만, 막부에선 항복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에도를 탈출하여 친막부파가 많은 동북부 지역으로 가서 계속 전쟁을 이어나가려고 했고

이에 따라 전쟁은 1869년까지 계속 이어집니다. 

그리고 대충 전쟁 수습이 된 1868년 11월에 메이지 덴노가 도쿄(에도에서 이름이 바뀜)에 머물렀다 교토로 돌아오고

다음 해인 1869년 5월에 다시 도쿄로 갔다가 교토로 돌아오지 않으면서 막부 말기의 격변을 뒤로 하고 교토는 수도란 상징을 잃습니다.

물론 메이지 덴노와 조정은 교토 시민들의 반발 때문인지 당시에 공식적으로 '천도'하지 않고 도쿄로 떠났고

현재도 법적으로 명확히 도쿄를 수도로 정한다고 규정 지어놓지는 않았기 때문에

교토 사람들은 아직도 '엄밀히 말하면 여전히 교토가 일본 수도'라고 주장하곤 합니다. 




다음 글은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항복한 후에도, 항복을 거절하고 계속 동북부에서 전쟁을 이어나간 친막부파의 이야기와

친막부파의 중심축 중 하나였던 아이즈 번에 대한 이야기로 하겠습니다. 

일본 근대사 이 동네만 알아도 대충 파악 가능하다 1편 - 교토

 제목은 근대사라고 잡았지만, 오늘은 일본에서 근대의 시작으로 여기는 메이지유신(1868년) 이전 내용이 더 많이 들어갑니다.

왜냐하면 정치 중심지로의 교토는 1853년과 1854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군함들을 끌고 와 200년 넘게 이어진 도쿠가와 막부의 쇄국 정책을 무너뜨리고

미일화친조약을 맺고 개항을 한 1854년과, 메이지유신의 시작인 1868년 사이가 가장 전성기였기 때문입니다. 


일단 1854년 이전까지 교토는 1000년간 일본에서  덴노(천황)이 머무는 명목 상의 수도였고, 조정도 존재하고 신하들도 있었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실권은 없던 상태였고, 특히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막부(사무라이 정권)를 성립한 1603년 이래로는 더욱 막부의 강력한 통제 아래에 있었습니다.

즉 정치적 중심지는 에도(현재 도쿄)였고, 교토의 덴노와 조정은 그들만의 리그였던 셈입니다. 

이들의 역할은 일본 고유 신앙에 따라 신에게 제사 지내고, 예술을 하고, 전통 예절을 가르치는 정도였죠. 


근데 1854년 막부가 개항을 결정하면서 덴노와 조정, 나아가 다이묘(지방 영주)들에게 이 문제에 대해 상의를 합니다.

막부 입장에서는 200년간 지속된 쇄국 정책을 바꾸는 것이기 때문에 조정과 덴노의 의견을 물어본 것이었는데

문제는 이전에는 막부가 이런 상의조차 안해왔다보니, 조정에선 갑자기 이런 중책에 대한 의견을 내야하는 것에 난리가 납니다.

막부 입장에선 덴노와 조정이 수백년간 그래왔던 것처럼 외교 업무를 막부에 일임하는 것을 바랐지만

조정, 특히 당시 고메이 덴노(메이지 덴노의 아버지)는 개항 정책에 반대를 하면서 막부는 곤경에 처합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끝내 덴노의 허락을 받지 못한 채 막부는 미국과의 통상조약을 강행합니다. 


막부가 개항을 결정한 것은 의외로 막부의 현실 인식이 상당한 수준이었다는 것이 현재의 정설이라고 합니다. 

막부는 유일하게 교역을 하던 네덜란드를 통해 서양 세력의 수준, 목적, 무력에 대해 상당히 파악하고 있던 상황이었고

지금 서양 함대가 에도로 들어가는 바다를 봉쇄해버리면 막부 입장에선 도저히 막을 수 없고

수십만의 인구가 살던 에도는 물자가 봉쇄되는 순간 말라죽을 거라 생각해서 서양 세력이 요구하는 개항을 들어줄 수 밖에 없었고

동시에 막부 내부에서도 개항파들이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그에 비해 계속 개항을 반대한 고메이 덴노와 조정은 현실적인 감각은 거의 없이 '불타죽어도 오랑캐랑 싸워야한다.'는 식이었죠. 


문제는 현실론에선 막부가 타당하지만, 명분론에선 막부가 밀릴 수 밖에 없었다는 점입니다.

첫 번째는 위에서 말했듯이 덴노는 개항을 반대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막부가 덴노의 명령을 거스르는 형태가 되었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막부의 최고 지도자 쇼군은 원래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 오랑캐를 정벌하는 대장군이란 뜻인데

오랭캐들이랑 싸우라고 한 막부가 서양 오랑캐들과 손을 잡고 개항을 추진해버리는 꼴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막부의 존재가 뿌리부터 흔들리는 상황에서 하급 무사들을 중심으로 막부를 타도해야한다는 의견이 높아집니다. 

도쿠가와 막부 성립 후 막부는 반란 방지와 사회 통제를 위해 하급 무사들을 통제하려고 했고

그에 따라 하급 무사들은 어중간한 신분에 경제력도 없고, 신분 상승도 막혔기에 막부 체제에 불만을 가져왔습니다. 


여기에 위에 설명한 다이묘, 지방 영주들의 입장까지 들어가면 더 복잡해집니다. 

애초에 도쿠가와 막부가 생겼을 때 막부는 자신들에게 적대적이었던 다이묘들을 반란을 우려하여 에도에서 먼 쪽으로 영지를 줘버리면서 쫓아냅니다.

그 후 도쿠가와 막부가 후기에 들어서면서 통치 체제가 느슨해지자, 이 틈을 타서 밀무역을 통해 부를 습득하고 서양 문물을 들여오거나

막부의 눈을 피해 지역 내부에서 개혁 정책을 피면서 몰래몰래 힘을 키워나가는 다이묘들이 생겨나게 되는데

어차피 막부하곤 원래 사이도 안 좋았는데 거리까지 멀어서 통제도 잘 안되니 이들 입장에선 거리낄 게 없었던 겁니다.

또한 다이묘들은 실권은 없었지만 신분, 권위, 문화적 수준이 높았던 교토의 조정과 귀족들에게 줄을 대기 위해 돈을 바쳐가며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이런 모든 상황이 맞아떨어지자, 수백년간 정치에서 소외되었던 교토는 갑자기 정치적 중심지로 떠오릅니다.

서양 세력을 몰아내야 한다고 밀서까지 뿌려대면서 서양 세력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내던 고메이 덴노,

어떻게든 덴노를 설득시키기 위해 조정에 설득과 협박 등을 써가며 조금이라도 더 막부파를 심으려는 막부

그 사이를 눈치 보며 서서히 자기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지방의 다이묘들이 합세하고

막부에 불만이 있던 하급 무사들이 막부를 공격하기 위한 정치적 구호로 존왕양이, 즉 서양 세력과 손잡은 막부 대신 덴노가 권력을 쥐고 서양 오랑캐를 쫓아내야한다를 내세우며

교토로 진출하면서 개항파나 막부파에게 정치적 테러를 가합니다.

이런 자들을 유신지사, 양이지사라고 불렀고, 막부는 이런 테러를 일삼는 양이지사를 상대하기 위한 무력 집단을 만드는데 그게 신선조(신센구미)입니다. 

일본 만화나 드라마, 영화에서 나오는 신선조는 도쿄가 아니라 교토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집단입니다.

어릴 때 '바람의 검심' 많이 본 사람들이라면 주인공 히무라 켄신이 유신지사였고, 히무라 켄신의 라이벌인 사이토 하지메가 신선조였죠.

 

이런 격변 속에서 일어난 굵직한 사건의 시작 지점의 대부분은 교토였습니다. 

고메이 덴노의 지속적인 양이, 즉 서양 세력에 대한 공격 요구에 결국 막부의 최고 지도자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1863년에 교토로 상경합니다.

이전까지는 덴노와 조정을 상관하지 않고 정책을 펴던 막부가 교토로 상경한다는 건 결국 정치적 실권이 막부에서 서서히 조정으로 넘어가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죠. 

근데 재미있는건 고메이 덴노는 정작 양이 외에는 친막부 행보를 보였는데, 아마 보수적이었던 고메이 덴노가 기존 막부 체제가 무너지는 것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라 봅니다,

그리고 이는 막부가 그래도 어느 정도 교토에서 정치적으로 비빌만한 자산이 되기도 했습니다.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는 덴노와 조정에 양이를 맹세하지만, 서양 세력과 싸워봤자 진다는 걸 알았기에 속으로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고,

지방의 다이묘들 역시 현실파악은 하고 있었기에 움직이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습니다. 

딱 하나, 현재 야마구치현에 위치한 조슈 번(당시 일본의 지역 단위, 현재 현으로 바뀜)만이 극단적인 존왕양이 파벌들이 장악해서

군사를 동원해서 서양 함선을 공격하였는데, 그나마도 열받은 서양 세력들이 조슈 번을 공격해서 박살내버리는 바람에

조슈 번, 그리고 존왕양이파, 그리고 양이에 바람을 불어넣은 덴노까지 모두 정치적인 입지가 축소되고 맙니다.

이 때를 노려 친막부 온건파에 가까웠던 사쓰마 번(현재 가고시마현)이 조슈 세력들을 교토에서 몰아내고 자신의 영향력을 강화시킵니다. 

거기에 조슈 번은 불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병사들을 이끌고 교토 왕궁을 쳐서 정권을 잡으려는 무리수를 두다가

도리어 막부와 사쓰마 번의 역공을 받아 실패하고 역적이 되버립니다. 


막부는 조슈 번을 정벌하려고 했지만 힘이 부족하여 조슈의 존왕양이 강경파를 쫓아내고 친막부파를 지도부로 세우는 선에서 타협을 하고 후일을 기약하지만

타협을 했던 조슈에서 정변이 일어나 다시 강경파들이 정권을 잡아버립니다.

이 강경파들은 서양 세력에게 참교육을 당했기 때문에 서양 세력의 막강함을 깨닫고 개항파로 노선을 틀면서 동시에 막부 타도 노선은 바꾸지 않습니다.

사실상 일본에서 이 시기를 기점으로 개항에 반대하는 세력은 사라집니다. 그에 따라 계속 양이를 주장한 고메이 덴노도 힘을 잃습니다. 


막부는 다시 조슈를 정벌하려고 군사들을 동원해서 조슈를 공격하지만 문제가 발생합니다.

조슈가 사라진 교토에서 정치를 주도하려고 했던 사쓰마 번의 정치적 계책을 막부파이자 차기 쇼군 후보였던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정치력으로 번번이 무너뜨리면서

막부는 일시적으로는 교토 조정에서 정치적인 영향력을 지키는데 성공하지만

이에 열받은 사쓰마 번이 반막부파로 돌아서면서 토사 번(현 고치현) 출신 사카모토 료마의 중재로 조슈 번과 비밀리에 동맹을 맺고 조슈에게 신식 무기와 물자 등을 대여해주고,

조슈 내부도 개혁을 하며 군사력을 강화하자 막부의 조슈 정벌은 끝내 실패하고, 설상가상으로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사망합니다. (1866년 8월)

그리고 양이파이자 친막부파였던 모순적인 행보를 이어간 고메이 덴노도 곧이어 사망하면서 교토는 다시 정치적 격변을 맞이합니다. (1867년 1월)

막부에선 교토에서 정치력을 발휘하며 능력은 입증했지만, 막부 내부에서 취약한 입지를 가진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1867년 1월에 쇼군이 됩니다.

그리고 거의 비슷한 시기 16세의 나이로 고메이 덴노의 아들 무쓰히토가 메이지 덴노로 즉위합니다.

이제부턴 메이지 시대인 셈이죠. 



글이 너무 길어지니까, 나머지는 다음 시간에 하겠습니다. 

다음 내용은 어떻게든 막부를 이어보려는 새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와 친막부파,

그리고 막부를 무너뜨리고 새 덴노 메이지를 얼굴마담으로 새로운 정부를 만들려는 사쓰마, 조슈 등의 반막부파의 대결이 됩니다.

그리고 1868년 메이지유신을 기점으로 교토가 다시 정치적 영향력에 더해 수도라는 상징까지 잃게 되는 과정이 되겠습니다.


일본 아이돌 '노기자카46'의 어원과 관련된 흥미로운 이야기

 2000년대 이후 일본 아이돌에서 가장 성공한 사례가 AKB48입니다. 

이 명칭은 '지역+숫자'로 이뤄져있는데 

이 명칭의 원조뻘 되는 AKB48 같은 경우 도쿄 아키하바라에서 시작된 그룹이고  이후 전국에 이런 그룹들을 만들죠. 

미카미 유아가 AV배우 데뷔하기 전에 나고야의 도심인 '사카에'에서 명칭을 따온 SKE48의 멤버였죠. 

이들의 라이벌로 꼽힌 '노기자카46' 역시 명칭은 '지역+숫자' 규칙에서 가져왔는데

이들의 소속사인 소니 뮤직의 건물이 있던 곳이 통칭 '노기자카'란 지명으로 불리기 때문입니다.

그럼 '노기자카'란 이름을 분석해보자면 '노기'는 근방에 있는 '노기 신사', '자카'는 일본어로 '언덕'을 뜻하는 것이니 즉 '노기 신사 근방 언덕'이라는 뜻입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냥 '압구정 거리' 느낌의 어찌보면 흔하디 흔한 네이밍 센스라고 볼 수 있는데요.



근데 이 명칭의 원인이 된 '노기 신사'가 과연 누구을 신으로 모시느냐를 알면 상당히 놀랍습니다. 

'노기 신사'에서 신으로 모시는 인물은 노기 마레스케 장군(1849~1912)입니다.

근데 이 사람의 출생과 사망년에서 알듯, 이 사람은 일본 근대 시기 인물입니다.

그럼 노기 마레스케가 과연 어떤 인물이냐를 알아보면 더더욱 상상도 못할텐데요.


노기 마레스케는 조슈 번 출신으로, 어린 시절 쇼카손주쿠라는 조슈 번의 개인 학당에 다니는데

이 쇼카손주쿠의 초대 창립자인 요시다 쇼인의 친구들, 제자들이 일본 메이지유신의 주역들이 됩니다. 

(단적으로 이토 히로부미와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여기 출신이었습니다)

그리고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 육군들을 조슈 번 출신들이 주류를 차지하게 되는데

이들보다 조금 어린 나이였던 노기 마레스케 역시 학연, 지연의 도움을 받아서 군인으로 출세를 합니다. 


노기는 러일전쟁 때 육군 제 3군을 맡아서 굵직한 뤼순 공방전과 봉천 전투 등을 치루는데

군인으로의 능력은 그렇게까지 무능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썩 특출나지도 않은 정도였습니다. 

특히 뤼순 공방전 때는 승리하긴 했지만, 러시아군의 요새에 그대로 공격하면서 병력의 절반 정도인 6만명에 가까운 사상자를 내는 엄청난 피해를 입습니다. 

이것 때문에 당시만 하더라도 무능하단 평가도 많았고,

수많은 전사자 유족들이 분노하여 항구로 귀국하는 노기에게 항의하려고 모였으나

노기 역시 전쟁에서 두 아들을 잃고 두 손에 아들들의 뼛가루가 담긴 병을 들고 배에서 내려오자 그냥 물러났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노기는 평생 러일전쟁의 책임감에 시달렸다고 하며, 메이지 덴노에게 자결을 요청했으나 '내가 살아있는 동안 허락할 수 없다.'면서 거절당합니다.

그러다 1912년 메이지 덴노가 죽자, 메이지 덴노의 장례식이 이뤄지는 중에 자택에서 아내와 함께 자결합니다. 

노기의 자결은 일본에 엄청난 충격을 가져왔으며, 일부에선 노기를 충신이자 군신으로 추앙했으나

일부에선 야만적인 관습으로 전혀 교훈이 될 것이 없다고 비판합니다. 

하여튼, 이런 사연 때문에, 노기 마레스케는 메이지 덴노의 충신이란 이미지를 얻으며, 메이지 덴노와 관련된 곳 근처에는 노기를 신으로 모시는 노기 신사도 지어졌습니다.

도쿄 노기 신사 같은 경우에도 근처에 메이지 덴노의 장례식을 치룬 '메이지 신궁 어원'이 있습니다. 

그리고 1912년 9월, 노기의 죽음을 추모하면서 이 지역을 '노기자카'라고 부르기로 합니다. 




여담.

메이지 덴노와 관련있는 곳에는 노기 신사가 지어졌다고 했는데

대표적으로 교토 남부 후시미의 메이지 덴노의 무덤 근처에도 노기 신사가 있습니다. 

여기엔 '충혼'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큰 비석이 있는데,

그 글자는 육군대장이자 조선총독부 총독으로 교과서에서 '민족말살정책'이라 부르는 강력한 내선일체 정책을 추진한 미나미 지로의 글씨입니다. 

그리고 서울 남산에서도 일본 덴노가의 시조로 여기는 태양신 아마테라스와 더불어 메이지 덴노를 신으로 모시는 조선신궁(현 남산공원)을 세우자

그 근처에 노기 신사를 짓는데, 그 위치는 현재 리라초등학교 근방입니다. 



여담2.

노기 마레스케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서 일본으로 끌려온 조선인의 후예였다고 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러일전쟁에서 노기가 이끈 일본 육군이 승리하면서 결국 조선의 운명은 일본의 지배로 끝나게 되죠.